'1980 5.18 光州'는 진정으로 민주화 운동이었는가? #9
- 10.26 --> 12.12 --> 5.18
- '5.18 光州'는 軍部 재집권의 길을 열어준 反民主的 사태
'5.18 光州'가 민주화를 위한 의로운 旅程이었다면, 그것은 '마땅히' 필요한 시기에 '마땅한' 일이 벌어졌어야 한다. 오히려, 불필요한 시기에 불필요한 사태가 발생하여 민주화의 일정을 더더욱 더디게한 反민주적 사태이었을 뿐이다. 일단, 1980년 무렵, 그 당시의 시각에서 국내외 정치 상황의 흐름을 살펴보자.
國內 정치 상황을 보면, 10.26 이후 12.12와 5.18 당시의 대통령(권한대행 포함)은 최규하(崔圭夏)이었다. 최규하(崔圭夏)는 10.26 이후 거의 즉시 자동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 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다가 12.12 바로 며칠전 12월 6일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2월 21일에 취임하였다. 당시 최규하(崔圭夏)는 민주 국가의 일반적인 대통령 선거 절차에 의해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 아니었다.
1) 우리나라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하게 단독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즉, 쉽게 얘기하면, 1979년 12월 大選에서 최규하(崔圭夏) 이외의 후보는 없었다. ( 하단, 참고 1 )
2) 통일주체 국민회의라는 선거인단 체제의 간접 선거 방식으로 선출되었다.
3) 12월 6일 단 하루에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즉, 12월 6일에 투표 , 개표 , 당선 등이 한꺼번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반적인 민주국가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절차에 따라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취임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든 정치세력을 포함한 全國民이 암묵적으로 이러한 절차에 절대적으로 동의"하였기 때문이다. 全國民이 이처럼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취임에 동의한 이유는 오직 단 하나의 전제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제조건이란 다름아닌 '駐韓美軍 철수라는 안보 위기를 직시하면서,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헌법으로 개헌을 하여, 새 헌법에 맞추어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다"라는 대강의 정치 일정에 全國民이 동의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 당시 기준으로, 가장 평화롭고 신속하게 민주화 일정을 진행한다는 全國民(在野 및 軍部를 포함)의 암묵적인 동의에 따라 과도기적인 대통령으로 최규하(崔圭夏)가 선출된 것이었다.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1984년까지의 임기를 전부 채우고 퇴진한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던 시절이었다.
한편, 국제정치 및 우리나라 안보 상황을 살펴보면, 당시 美國 대통령 지미 카터 (1977-1981)의 신념에 따라, 朴正熙 대통령이 생존하였을 당시부터 韓國 정부가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고 있슴에도 불구하고, 駐韓 美軍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면서 韓美 同盟관계가 거의 파탄으로 달리고, 韓半島가 제2의 越南으로 내달리던 시점이었다. ( 1972년 2월 베트남전 美軍 철수, 1974년 4월 越南 패망 共産化 )
( 주, 지미 카터의 駐韓 美軍 철군 정책은, 김재규가 朴正熙 대통령을 암살하도록 부추기는 오판의 주요 원인이 됨,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김재규의 朴正熙 대통령 암살때문에 지미 카터의 駐韓 美軍 철군 정책이 중단되는 계기가 됨. 김재규는 法廷에서, '자신이 朴正熙 대통령을 제거하고 집권에 성공하면, 지미 카터의 美國 정부가 자신을 반대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다'라는 요지로 진술 한 바 있슴. )
이러한 국내외 상황을 요약하면, 1) 모든 국민이 합심하여 안보 위기를 극복하면서, 2)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민주화를 달성하는데, 3)전국민이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일단 최규하(崔圭夏) 정부가 원만하게 굴러 갈 수 있도록, 在野와 軍部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절대적으로 협조하여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 최규하(崔圭夏)가 부득이하게 12.12 를 사후 승인한 이유로는 ' 이와 같은 국내외 정황을 고려하여 국정 전반을 크게 파탄내지 않고 모든 절차를 원만하게 마무리하고자' 하는 희망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국정 전반을 어떻게든지 원만하게 이끌어가서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는 욕심때문에 당분간은 참는다' 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
해가 바뀌어 1980년으로 들어서면서, 절대 다수의 국민들은 이와같은 정치 일정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개헌 및 차기 대통령 선거의 열망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3월 새학기에 접어 들자마자, 대학가를 중심으로 좀 더 신속한 일정의 민주화 촉구 시위가 빈발하기 시작하였다. 날이 갈수록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일반 국민으로부터 안보 우려감 증폭에 따른 在野 세력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도 등장하게 되었다. 오죽하였스면, 김대중을 비롯한 在野 민주 세력에서는 '軍部가 재등장할 빌미를 줄수 있으므로 학생들의 시위는 자제하라' 라는 소리 들이 나타났었고,김대중과 김영삼의 양보 없는 무한경쟁 양상을 접하게 되면서,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도 대두하게 되었다. )
김대중-김영삼 무한경쟁의 결과로 실망감에 젖은 국민들에게, 5.18 光州사테는 더더욱 민주화에 대한 환상 만을 일깨우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駐韓 美軍 철수와 맞물린 안보 위기론에 따른 軍部 재집권의 당위성만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당시 시점에서 5.18 光州 사태의 정치적 의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과도 정권 최규하(崔圭夏) 취임이후 불과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5.18 光州 사태 발생
2) 김대중과 김영삼 등 在野세력끼리의 무한경쟁에 의한 민주화 실망감과 안보 위기감으로 軍部 재집권에 대한 거부감이 약화되는 것과 겹쳐지면서 5.18 光州에 대한 타지역 호응은 全無
3)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위기 관리 능력에 대한 의문감과 함께 5.18 光州 사태는 군부 재집권의 가장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
4) 당시 레이건 對 카터의 차기 美國 대통령 선거전이 불붙으면서 ( 결국 현직 카터가 레이건에게 패배하여 카터는 연임에 실패 ), 韓國의 혼란 상황을 접한 美國의 오피니언 리더 들은, 軍部가 재집권하는데 대한 암묵적인 사전 승인 신호를 보내게 됨.
5) 5.18 光州사태가 없었더라면, ( 즉, 질서 정연한 민주화가 이행중이었더라면 ), 국민적 열망과 美國의 태도는 軍部 재집권을 용인 할 수 없는 조건이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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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1960년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선거기간중 사망하여, 선거일 기준으로 이승만 후보가 단독으로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적이 있슴.
참고 2) 朴正熙 대통령이 사망하기전 1979년 6월 무렵에 카터 美國 대통령이 訪韓하면서 駐韓美軍 철수가 중단되었으나, 당시 韓國정부에서는 지미카터의 訪韓에 따른 일시적인 우호조치로 보고 있었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