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스위스에서 있었던 기본소득에 관한 국민투표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치열한 찬반 토론이 있었으나 예상보다 많은 77%가 반대해서 이 안은 부결됐다. 그러나 “알파고에게 인간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이세돌이 패배한 것”이라고 이세돌이 말했듯이 기본소득이 패배한 것이 아니고 스위스의 기본소득 안이 패배한 것이다. 기본소득은 앞으로도 핀란드,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계속 검토하고 투표에 부칠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본격 등장할지 모른다.
기본소득이란 국민 모두에게 최저 수준의 소득을 아무 조건 없이, 그리고 재력조사 없이 똑같은 액수를 지급하자는 것이다. 즉, 만인에게 균등 지급하는데 다만 어린이는 어른에 비해 적은 액수를 준다. 이번에 부결된 스위스의 기본소득 안은 기존 복지정책을 전폐하면서 성인은 월 300만원, 아이들은 월 78만원을 주는 안이었다. 이 제도의 장점은 현행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막대한 행정비용을 절약하고, 빈민을 가려내기 위한 재력조사가 생략되므로 빈민의 낙인효과, 수치심 유발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마이너스의 소득세와 비슷하다. 스위스에서 반대표가 많이 나온 이유는 사람들이 게을러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그리고 외국인들이 대거 이주해오면 어떻게 감당하나 하는 걱정이었다.
이 제도의 실제 운영 사례로는 미국 알래스카주에서 1980년대 초부터 주민들에게 균등 배당을 지급하고 있는데, 그 액수는 초기 1인당 연 300달러에서 지금은 2000달러대로 상승했다.
브라질에서는 룰라 시절 시작한 ‘보사 파밀리아’라는 가족수당 제도가 기본소득과 비슷한데,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4500만명이 혜택을 받았다. 이 제도는 브라질의 악명 높은 불평등과 빈곤을 눈에 띄게 줄였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독일에서도 최근 기본소득을 활발히 토론 중인데, 주동자는 놀랍게도 대기업 회장 괴츠 베르너이다.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기원은 1516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찾을 수 있다.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라파엘은 이렇게 말한다. “도둑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것은 정당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처벌로는 너무 가혹하고, 범죄 억제책으로는 너무 비효율적입니다. 가벼운 도둑질이 사형을 받을 만큼 나쁜 죄는 아닙니다. 그리고 음식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 도둑질밖에 없다면 이를 막을 형벌은 세상에 없습니다. … 혹형 대신 만인에게 약간의 생계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합니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본격적인 정책 아이디어로 제시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이후 기본소득 주창자 중에는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벨기에의 필리프 판 파레이스가 있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중에도 허버트 사이먼, 제임스 미드, 제임스 토빈, 밀턴 프리드먼이 있다.
특히 ‘토빈의 Q’와 ‘토빈세’로 유명한 제임스 토빈은 1972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이 내놓은 연 1000달러 기본소득 공약의 창안자였다. 맥거번은 역대 민주당 후보 중에서도 가장 왼쪽에 서 있는 후보라고 평가되지만 기본소득 공약은 당시로서는 아무래도 생소하고 급진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던지 나중에는 철회했다. 맥거번 후보의 진보성은 요새 미국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와 막상막하가 아닐까 한다. 결국 맥거번은 닉슨 후보에게 참패했는데, 지금 샌더스는 민주당 예선에서 힐러리에게 지긴 했지만 만일 본선에 진출한다고 가정하면 승리 가능성이 힐러리보다 훨씬 더 높다고 하니 미국 국민의 민도가 그만큼 진화한 것인지, 아니면 불평등 문제가 그만큼 심각해서 그런 것인지.
스위스에서 제시한 월 300만원은 아무래도 과도한 느낌을 준다. ‘첫술에 배부르랴.’ 만약 월 100만원 정도를 제시하면서 기존 복지정책을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는 온건책을 내놓았더라면 어땠을까? 앞으로 다른 나라에서 현실성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면 기본소득 안이 채택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유엔 미래보고서에서 2030년까지 20억개의 일자리가 소멸하고, 현존 일자리의 80%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정말로 20 대 80의 사회가 올지 모른다. 그 단계에 가면 일 못하는 사람들에게 생계를 보장하는 방법으로 기본소득이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재 서울시와 성남시에서 추진하는 청년배당 정책도 넓게 보면 기본소득 안인데, 액수가 과다하지 않고 장점이 많으니 적극 추진할 만하다. 정부는 이 안을 시행하면 교부금을 삭감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박해하고 있는데, 오히려 중앙 정부에서 확대 시행할 방법을 연구함이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