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 5.18 光州'는 진정으로 민주화 운동이었는가? #5
- 5월 18일 前과 後
朴正熙 대통령 서거 이후 해가 바뀌어 1980년으로 들어서면서, 겨울이 지나고 봄으로 접어 들자, '서울의 봄(春)'이라는 용어가 언론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며칠 지나는가 싶더니만 어느순간에, '서울의 봄' 이라는 용어가 정치현상의 일부로서 하나의 관용구처럼 사용되는 지경이 되어 갔다. 유신 독재가 무너짐과 아울러 금방이라도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하루빨리 완전한 直選 대통령이 들어서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대감이 묻어 있는 용어이었다. 그러나 정치 현실은 국민의 기대감을 따라오지 못하면서 5월 17일까지 全國的으로 무수한 大小 규모의 민주화 촉구 시위가 빈발하였었다.
光州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었고, 이러한 시위 들은 대부분 대학생 중심의 비폭력 평화적 거리 행진 위주이었으므로, 진정한 민주화 촉구 시위라고 단정 할 수 있다.
그런데 대학생 중심의 시위대는 5월로 들어서면서 대학가 중간 고사가 끝나고 봄철 축제 시즌이 다가오자, 폭력성을 띠면서 점점 더 과격한 양상으로 변하였다.
이런 상황이 되면 정부는 당연히 할일을 하여야 한다. 치안 부재 현상을 바로 잡는 일은 정부의 당연한 책무이므로, 5월 17일 자정(5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하여 발령된 비상계엄확대 ( 지역계엄 --> 전국 계엄 ) 조치로 상징되는 시위 금지 조치는 어쩌면 때늦은 감이 있는 조치라고도 할 수 있다.
정부의 정책과 조치들이 국민의 기대감을 따라오지 못한다고하여 국민들이 폭력으로 시위를 하게되면, 이러한 시위는 아무리 목적이 고귀하더라도 진압하여야 한다. 5월 17일 자정을 기준으로 , 계엄령 확대 조치와 더불어 폭력 시위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분명해 졌다. 시위 주동 세력이 구금되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으로 대부분의 시위는 소멸되었고, 일단 정부의 조치를 지켜보는 분위기가 되어 갔다.
이러한 흐름이, 5월 18일 以前까지 光州를 비롯한 전국적인 시위 전개 과정이었다. '5.18 光州"라고 표현 할 때, 이 시기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제 '5.18 光州'라고 표현되는 시기에 접어 들게 된다.
5월 18일 0시부터 적용되는 계엄확대 조치에 나타난 정부 당국의 강경 방침으로 보아서, '웬만큼 간뎅이가 부어 있지 않고는' 감히 길거리 시위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스며 들었다.
그런데 全南大(속칭, 全大)와 朝鮮大(속칭, 朝大)로 상징되는 光州지역 대학가에서는 약간 異常 기류가 나타났다. 대학생 뿐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실망감에서 비롯된 이상기류가 나타났다. 계엄확대 조치와 더불어 연행된 수많은 민주 인사 들중에, 거의 차기 대통령으로 기정 사실화 된 것처럼 보이던 湖南 출신 '金大中 先生'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래, 부연설명 참조)
게다가 金大中은 계엄사 연행이고 경쟁자 金永三은 가택 연금이다. 체감 온도가 다르다. 光州 湖南 지역주민들에게는 실망감과 분노감이 번져 나갔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시위가 소멸되었으나, 유독 光州지역에서만은 새로운 구호가 등장하면서 시위 양상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 글로 쓸때는 이렇게 쓰지만, 소리내어 구호를 외칠때는 '전투화 물러가라 김대중 살려내라' 라고 소리친다 )
이른바 '5.18 光州 항쟁'의 서막이 올랐다. '전투화 물러가라 김대중 살려내라' 경남 합천 출신 전두환과 대비한 湖南 출신 金大中 사이의 새로운 嶺湖南 대결이 시작되었다.
거의 대부분이 同鄕 사람들로 구성된 경찰 병력들이 嶺湖南 지역대결을 외치는 시위대를 효과적으로 제압 할 수는 없었다. 嶺湖南 지역 대결 분위기로 시위 구호가 변하면서, 학생들 중심의 시위대에 일부 地域民 들이 가세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에 직접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지나가는 시위대에 박수를 치고 호응하면서 음료수를 제공하는 시민들도 부쩍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光州 시내 경찰력만으로는 감당 할 수 없게 되자, 全南 지역 全域에서 경찰관들을 차출하여 光州시내 경찰 병력에 합류 시켰으나 지역대결 분위기의 시위 진압에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시위대나 경찰병력이나 모두들 동향 사람들인데.
경찰력만으로는 감당이 안되자, 光州 지역 향토 방위 사단 31사단 소속의 계엄군이 길거리 시위 진압에 직접 투입되기 시작하였다. ( 31사단과 전투교육사령부는 모두 光州 인근 상무대에 본부가 있다 ) 그런데 31사단 병력 태반은 光州 湖南 지역 대학생 출신이다. 光州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휴학계를 내고 軍입대를 하여 論山 훈련소를 마치면 가장 우선적으로 31사단에 배치된다. 비약해서 표현하면, 시위대는 光州 지역 現職 대학생 들이고, 진압 병력은 光州 지역 대학 휴학생 들이다. 한두집 건너뛰면 서로 모두가 사촌 팔촌 형제간이다.
결국 31사단 중심의 계엄군도 시위 진압에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게 되었다. 31사단 병력도 물러나고 새로운 계엄군이 등장하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이른바 공수부대 계엄군이 시민들 앞에 등장하였다. 온갖 유언 비어가 나돌면서 '慶尙道 군인들이 全羅道사람 때려 잡으러 왔다' 라는 소문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지역 대결 감정에 휩쓸린 地域民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시위 형태도 평화적 거리 행진에서 벗어나서 진압 병력에 대한 돌팔매질로 완전히 변하였다. 경찰력과 31사단 병력이 실패한 작전에 교체 투입된 새로운 계엄군은 毒氣를 뿜고 시위진압 작전을 수행해 나갔다.
이미 민주화(학원 탄압 중지, 언론 검열 폐지 등)라는 구호는 실종되었다. '전두환 물러가라. 金大中 석방하라' ( 전투화 물러가라 金大中 살려내라 ) 라는 구호와 '慶尙道 군인들이 全羅道사람 다 때려 잡는다' 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면서, 시위대와 진압군 사이에 피튀기는 공방전이 가열되어 갔다.
'5.18 光州'라고 표현되는 시기에 접어 들면서, 더 이상 民主化 라는 大義名分은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오직 영호남 지역 대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거의 완벽한 언론 통제 속에, 영남 지역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전혀 알지도 못한채.
부연 설명 )
그 당시나 지금이나, 光州 湖南 지역에서 金大中 '先生'의 위상은 예수, 석가모니 혹은 교황의 위상을 능가한다. 無 종교인 들에게는 사실상의 唯一神이다.
영남지역에서 金永三 '前總裁'의 위상과 光州 湖南 지역에서 金大中 '先生'의 위상은 서로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光州 湖南 사람들이 생각하는 金大中 '先生'의 위상은 神 위의 절대적 존재이고, 영남 사람들이 생각하는 金永三 '前 總裁'의 위상은 神 아래 인간이다. 그래서 金大中 의원 혹은 金大中 前總裁라고 부르지 않고, '先生'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1980년 '서울의 봄' 시즌에. 그 당시 光州 湖南 사람들에게 金大中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 된 것이나 마찬가지 이었다.
이미 金大中은, 1971년 4월에 치루어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金永三과 李哲承을 극적으로 제치고 野黨 單一 후보로 선출되어, 당시 현직 대통령 朴正熙와 피말리는 승부를 펼친 끝에 패배한 바가 있었다. ( 朴正熙 후보 6,342,828 표 53.2% , 金大中 5,395,900 표 45.2% ) 1971년 당시의 선거 정황을 감안하면 사실상 金大中 '대통령 당선'이라고 표현하여도 부족하지 않을 결과를 기록한 선거이었다.
1971년 대선에서 金大中의 선거구호 중의 하나는 '湖南소외론'이었다. 嶺南 朴正熙 대 湖南 金大中의 嶺湖南 지역 대결 구도를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최초로 만들어낸 선거이었다.
이때부터 光州 湖南 지역민들에게는 朴正熙 시대 이후의 차기 대통령은 무조건 金大中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1980 5.18 光州'는 진정으로 민주화 운동이었는가? (시리즈) :
http://agora.media.daum.net/my/list?key=kPutT62.Ujk0&group_i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