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총선부터 드러난 지역감정 완화의 조짐이 이번 대선에서 더 두드러졌죠. 이제 영남은 무조건 누구, 호남은 무조건 누구, 그런 공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남이든 호남이든 지역감정 없이는 자기 밥줄이 끊기는 금뱃지들이 있어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대선에 지더라도 자기 밥줄을 유지할 수단이 필요합니다. 그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3당의 밀실야합을 계속 경계했던 것인데, 3당 중 하나쯤은 쿨하게 버릴 거라고 생각 못했다가 한 방 먹었네요.
바른당 의원 집단탈당은 결국 양당정치를 부활하겠다는 뜻입니다. 당장 홍준표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시 양당정치로 바꾸면 설령 대선에서 지더라도 지역구도만 부활하면 이후의 금뱃지 생활은 아주 편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이라 보면 될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서로 갈라설 때 도를 넘게 총질한 게 있기 때문에 다시 합치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역시 (구)새누리는 상식이 통하는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번번히 놀라게 되네요.
철새 13마리를 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새누리잖아요. 그러고도 남을 그릇이잖아요. 문제는 이 지경이 될 빌미를 제공한 민주당에게 있습니다.
박근혜 개인의 비리는 탄핵 및 구속으로 일단 죄값을 치르는 과정에 있습니다만, 박근혜와 함께 경제를 죽이고 나라를 파탄에 이르게 한 새누리의 만행은 전혀 심판받지 않았습니다. 경제도 망했고, 국민의 안전은 위협당해 각자도생이 트렌드가 되고, 위안부 합의와 국정교과서 등 역사를 유린하고, 대북관계도 파탄내는 등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망했습니다. 그런 걸 유권자에게 이야기하고, 그러니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서 자유당과 바른당은 솎아내달라고 이야기를 했어야지요.
그런데 선거판에 조기대선의 원인제공자 박근혜가 없어요. 나라를 말아먹은 여당이 없어요. 문재인이냐 반문재인이냐만 이야기해요. 상대가 유리한 판이 짜이도록 방관한 셈입니다. 그러니 반문재인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니까 도로 새누리당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에요. 만약 정권 심판을 외쳤다면, 바른당은 우리도 탄핵에 앞장섰다고 자랑하며 진짜 보수를 주장하느라 이런 코미디는 발생하지 않았겠지요.
이번주쯤부터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이 적폐청산을 강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더군요. 늦었어요. 그건 선거 시작부터 했어야 됩니다. 경선할 때만큼이라도 계속 대선 선거판에서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우리는 정책선거하겠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굳이 안 그래도 1등이고 당선가능성 높은데 괜히 영남 표심 역자극하는걸 피하려는 부자몸조심 때문인지, 결과적으로 패착이 되었습니다.
우려됩니다. 이대로면 문재인이 당선되더라도 지역감정은 부활할 확률이 높습니다. 영남이 저렇게 뭉치면 호남도 반사적으로 문재인에게 모일 확률이 높겠고, 결국 또 영남은 무조건 누구, 호남은 무조건 누구라는 식의 결과를 도출하게 되겠지요.
게다가 민주당은 과반이 아닙니다. 거대야당이 지역감정과 수구언론에 기생하며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드러누우면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문재인이라면 일단 까고 보는 국민의당이 억하심정으로 자유당과 공조하면 야당이 과반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구도는 설령 문재인이 당선되더라도 이후 굉장히 곤경에 처할 확률이 높아짐을 의미합니다. "압도적인" 승리라고 해도 그렇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상대는 여론을 신경쓰는 집단이 아니거든요. 손톱만큼이라도 나아지던 정치구도가 다시 원상복구하게 될 확률이 높아짐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적폐청산이 중요한 시대정신이었던 선거에서 그것을 소홀히 했거나 안일하게 여겼던 민주당의 잘못입니다. 엎질러진 물인데 딱히 주워담을 방법이 없습니다. 탈출구라고는 PK 유권자가 기적을 보여주는 것 말고 떠오르지도 않네요. PK가 아주 중요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