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그냥 쌉싸래한 커피를 시켜 마시는데, 오늘은 굳이 모카를 시켜 마시고 있습니다. 아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 싸 준 샌드위치, 그리고 달달한 커피. 뭔가 나를 달래줄 것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카페를 가득 채우고 있는 커피의 향도, 나를 조금은 달래주는 듯 합니다.
어젯밤 내내 이종걸 의원의 마지막 필리버스터를 지켜보고서, 참 오랜만에 그 사람의 & #39;진정성& #39;을 느꼈습니다. 문재인 대표의 발목을 잡을 때는 그렇게 밉더만, 어제는 저도 주먹을 불끈 쥐고 그를 응원했습니다. 그것이 & #39;정치 쇼& #39;라도, 그만한 쇼라고 한다면 기꺼이 관람료를 지불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럴 수만 있다면, 투표를 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힐러리 대세론이 이미 굳혀진 것 마냥 기사들이 나오던데, 이곳에서는 아직 희망이 죽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는 기사들이 뜨고 있습니다. CNBC의 기사들에선 버니 샌더스가 오히려 네 곳에서 자신이 이긴 것에 대해 놀라워하며 고무됐다는 기사가 떴고, 조금은 우울하던 제 마음도 그의 그 & #39;대책없는 낙관론& #39;에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필리버스터가 끝나고 기어이 악법이 통과되고 말았습니다. 필리버스터 과정을 통해 드러났듯, 이미 우리나라엔 테러를 막을 수 있는 법안들이 수두룩한데도 불구하고, 국외의 테러리스트는 막지 못하고 자국민들에 대한 감시만을 강화하기에 이것은 테러방지법이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법입니다만, 결국 분단의 현실로부터 비롯된 공포를 이용해 정권을 강화하려는 이 법은 결국 통과가 됐습니다. 페북 친구들의 플필엔 & #39;근조 민주주의& #39;가 뜨고, 친구들은 카톡을 탈퇴하겠다거나 아이폰을 쓰겠다는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뭐, 이제 조금 있으면 알겠지요. 심지어는 이 법을 반대했던 사람들 뿐 아니라 찬성하고 통과시켰던 사람들마저도 이 법의 무서움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겁니다. 아니, 벌써들 알겠지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사생활을 들춰낸 것은 누구였을까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왜 결정적인 순간마다 물러나는 스탠스를 보일까요? 지금도 이런데 이 법이 통과되고 나면, 그들은 얼마나 더 정권에 쩔쩔 맬지가 보이는 듯 하군요.
이제 본격적으로 유신의 망령은 관뚜껑에서 일어나 활보할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하는 것은 4월 13일 총선의 결과에 달려 있겠지요. 이종걸 의원의 마지막 호소는 참 깊게 다가왔었습니다. 몇년 전, 그가 이곳에 왔을 때, 저는 참 당돌한 질문을 던졌었습니다. 그때 그는 지금은 국민의 당으로 당적을 옮긴 정동영 전 고문과 함께였습니다. "왜 그 당은 맨날 그모양이냐? 왜 힘을 합치고 희망을 주지 못하는가? 수권 의지는 있는건가?" 제 돌발적 질문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그 두 의원을 초청해 자리를 마련한 주최측이었습니다. 그 자리가 파하고 나서, 그는 흔쾌하게 우리 가족과 사진을 함께 찍었고, 비공식적으로 이뤄진 술자리에서 자신이 강한 야당, 수권 의지를 보여주는 야당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습니다.
몇년이 지날때까지 저는 그의 약속에 늘 의문부호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아침, 그는 열 두 시간이 넘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제게 그의 진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의지가, 그 분노와 눈물이, 현실에서 응답을 받을 수 있길 바랍니다. 일단, 아쉽고 힘들었고, 행복했던 지난 일주일을 되새기며 생각합니다. 내가 어디 있든, 내 생활은 결국 정치가 결정하고, 참여는 바로 그 정치의 결과를 좌우한다는 것을.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