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포토뉴스
RSS
자사일정
주요행사
맨위로
BEST NEWS

문 대통령, "코로나 지나가도 치료제와 ...

 

여행은 나의 활력을 찾아주는 기분좋은 서비스!
국내 및 해외에 여행다니면서 멋있는 장면이나 재미있는 모습들을 담아주세요.
프린트
제목 탈영 배설 장군누명,명량 노량 해전의 진실청년기는 대실수이다. 장년기는 투쟁이다. 그리고 노년기는 후회이다.(디즈레일리) 울지 않는 청년은 야만인이요 웃지 않는 노인은 바보다.(조 2018-02-11 19:58:04
작성인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조회:8     추천:4

탈영범 배설씨는 부산에서 멀리도 도망갔나요?

기적적으로 세계 전사에 없는 엄청난 항해 403킬로 기록이지요?

배설이 진도로 탈영하지 않고 부산에서 죽었으면 조선은 없어 졌습니다. 

왜 그 먼 진도까지 가서 일전불사하려고 합니까?

일제식민시대에 그게 도망이라고  잘 못이라고 분명히 합니다.


명탐전 충무공께선 배설을 직접 찾아갔었고 전함 12척을 고물상에 였바꿔먹으려고 숨긴 것을 현미경으로 찾았지요?

감히 백의종군 사형수였든 이순신 장군을 보고도 배설은
"그대는 감옥에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 있는가?"라고 했다죠?

아무리 조선시대가 신분제라지만, 백의 종군 사형수 신세인 이순신 장군을 보고 그래 경어를 쓴것은 대단하죠, 요즘이 아니라죠,



선조 임금이 이순신장군에게 육지의 권율장군에게 합류하라는 어명이 내리니,

이순신 장군이 어명을 어길 수는 없고해서

배설 장군에게 육지로 해남으로 보냅니다. 수군은 배설 장군 동생 배즙장군이 지휘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수영에 배설 장군은 내려서 조선 수군을 위해 육지 해남에서 전쟁이 끝날때가지 전투를 했습니다.

그러니 조선 수군이 명량 대첩과 노량해전을 할 수 있었지요?



배설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 수군은 바로 전멸 당할 수도 있어요,


당시 배는 육지와 연계해서 물을 구해먹어야했어요,

 육지에서 경상 수군 조선 수군을 위해 싸워 준것이 배설 장군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배설 장군은 수군에서 전사한 동생 배즙 장군의 갑옷을 가지고 고향으로 귀향했습니다.


난중일기든 뭐든 진실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전쟁 끝나고 귀향했고 조선 수군을 위해 해남에서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그 전에 귀향했다는 것은 당시 당파싸움으로 정적 제거를 위해 올무를 만든 기록에 불과 하고 일제시대에 다시 조작되어 사실화 한 것입니다.

 

 

 

 

 

임진왜란의 승리는 정말 부끄럽습니다.

 

 전쟁나면 무조건 백성들 꾸역꾸역 적군에 총알받이로 쳐넣습니다.

전쟁준비할 돈은 지도층이 다 해쳐먹고는 이순신 장군처럼 정신력으로 싸워야 한다고 기만합니다.

 

오즉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조선군 목을 베는게 지쳤다고해서 목대신 부피가 작은 코를 베었겠습니까?


충추 탄금대 전투에서도 목을 벤 수가 9만 명이라니 이렇게 많은 머리를 어캐 가져갑니까?

제대로 싸운 일본군은 보통 100명 정도의 목을 베었으니 지칠만도 한 전쟁입니다.  그래서 코를 베어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 선조들의 기만은 이것은 아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십습니다.
                                          

 일본군이 아무리 목을 베어도 계속 조총은 새총이다면서 죽어러 나오는 조선군들에게 항복하고 물러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미래에는 이러한 국방을 되풀이 해서는 안되지만, 쩌겠어요?

나라의 지도자들이 그래 해먹는게 전통이고 문화인데요?

 

그래 해먹는것은 그렇다고 치고, 한양 백성들이 미쳐 도망하지 못하고 적치하에 갖혀 고통 받았는데, 선조 임금이 환도하면서 적에 부역했다고 남대문 앞에 끌어내서 마구 죽여서 나라의 기강을 세우기도 했더라고요,

 

요즘도 전쟁 이야기 나오면. "대전에 도망이나 피란 갈데가 어딨나, 미사일이 날아다닌다는데,,

 그냥 죽어야지 하시는데, "

이게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적치하에 그냥 있는 그 체가 반역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피란 가는  그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일단 위험을 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필요한 모함과 누명도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선조들을 욕하는 재미로 살아가는게 우리 후손들 입니다.

 

 

 

 

한산도에서 대승하고 노량에 이르러 갑자기 불어난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 때 공은 비분강개하여 호령하기를 "바다의 기운을 맑게 할 수만 있다면,이 한목숨 미련없이 바치리라".하고 적진을 종횡무진 유린타가 유탄을 맞아 순절 하였으니 향년 35세였다.


ㄱ, 명량 노량해전 기여도


1,명량, 노량해전의 1등 공신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우의정에 추증, 1604년 선무공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2, 명량, 노량해전의 최고 공신 배즙 장군,


1610년(광해2)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의금부 지사와 훈련원의 지사에 추증되었다.

 이같은 공의 사실이 경산지와 영지에 등재되어 있으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배즙 장군의 갑옷을 묻고 유허비를 세웠다.(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3, 노량 해전의 2등 공신 손문욱 장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노량해전을 대신 지휘 2등공신 절충장군에 승품되었다. 절충장군 손문욱은 권율의 궁중에서 인목대비를 축출하는 조정의 혼란을 부채질하여 세력을 누렸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배설과 금란지교를 맺은 한준겸이 인조반정을 읽으켜 손문욱과 간신들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었다.



손묵욱은 일본에 자진해서 대마도주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통해 대마도주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부역하였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이다. 원균과 배설은 손문욱과 요시라의 부하들과 수군을 사정없이 죽였기에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ㄴ,한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를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고 냉정하게 평가하겠습니다.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를 비평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봅니다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임명장입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지요

여기에 숙배하면 이순신과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지요

그래서 다음부터 이순신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항명하는 이순신과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 과 말입니다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등 모두 20여 종류라 작업 기간도 좀 걸릴 것입니다(배윤호)"


네, 명공은 육전에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떠 맡겨 육지로 보내고 배에 집착하는 이순신 장군에 모습도 난중일기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설 장군 입장에서 집요하게 배와 부대를 넘겨 받길 희망하는 이순신 장군의 의견에 다라도 경상 우도 수군의 조방장인 배즙 장군이 수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으니 배설이 흔쾌히 요양차 육지로 올랐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요즘 조그만한 티코 승용차도 운전면허증 있어야 운전합니다.

더욱이 종북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란 전함이 그냥 운영되겠습니까?

이러한 큰 배는 기라졸과 포수 기타 전함을 룬용하는 병력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 져서 전투를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들은 지금과 달리 주장이 다로 있어 다른 장군의 지휘를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 19일 숙배식을 거행하고 배설 장군이 9월 2일 육지로 하선한 이후 2주후에 명량 대첩이나 노량해전 까지 배즙 장군이 군대를 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육지에서 응원한 민초들이나 갑판위에서 백병전을 한 병사들이 보충되어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배즙 장군이 배설 장군을 따라 전투에 임하게 된 것은 충주 탄금대 전투와 상주전투 조경의 추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하고 전멸 당한 현장에서 배설은 살아 남아 김천의 향병을 모아서 수십명의 잔병들과 항거하고 있었다.


배설이 일본군과 조선군의 무기와 전투 전술의 무지에서 대패함을 아버지인 배덕문에게 알리고, 14세에 과거에 장원한 아들 등암 자장을 곽재우 장군에게 보내 의병을 거병할 것을 요구하 과정에 배건 부부가 먼저 배설의 요구로 긴 죽창을 수백개 준비해서 배설부대에 전해주려다가 일본군에 포위되어 부부와 200여 명의 성주 의병들이 전멸하자, 배즙 장군이 죽창과 와룡매와 버들 나무로 도깨비 방패를 만들어 배설과 함께 전장을 누비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아시가루 장창으로 상주 탄금대 추풍령 전투 에서 약 20만 대군의 목을 댕강댕강 잘라 충주 탄금대를 끼고 강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로 고니시가 9만명의 수급을 잘랐던 잘 나가던  일본군들이었다.



그런 일본군이 배설과 배즙 장군의 죽창부대에  크게 당황해 했었다. 체구가 외소한 일본군들에 비해 조선군은 늙은 큰호박 하나정도의 더 큰 키와 잘 발달된 체격을 이용 10자(3m) 크기의 죽장을 말 위에서 배즙 장군과 그 부하들이 내려 꽃는 공격력은 가히 모든 일본군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쟁쟁한 무사 24기사가 배즙 장군의  부상진 전투에서 전멸하고 그 수장인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배설 장군이 취할 수 있었든 것도 바로 무기와 전투전술의 우위 때문에 가능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조선정벌 승인 표주박문양의 황금부채 마저 빼앗기고 겨우 목슴이 붙어 도망쳤으나 끝내 칠천량에서 죽어 시체가 되어 돌아가게 할 수 있었든 것도 배즙 장군의 뛰어난 무공이 배설 장군을 바쳐주었었다.





5, 배설 장군의 묘소 바위에 각자로 기록된 봉토는 “周回 二十 里”이다.

장군의 묘소를 기준으로 지름 16Km,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로 성주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고, 약 6.000만 평의 땅을 하사받은 것이다. 이는 조선 왕조 역대 어느 왕족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묘지도 배설의 장산에 규모에 못미칠뿐 아니라 임진왜란 참전 모즌 장수에게 내려진 봉토 전체보다도 더 큰 규모의 장지로 선조의 스승 퇴계  이황선생에게 내련진 사원의 규모보다도 약 만배가 넘는 규모이다.


 

실제로 이정도 거리 안쪽으로 배설장군의 후손이며

지금 살고있는 후손들의 선대 묘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이렇게 묘소가 있는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면적이다.

이러한 면적은 지금의 성주군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는 넓이이다.

 

지금 배설장군의 묘소는 경북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에 있다.

그 부친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에 있다.

그 큰 아들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 있다.

그 둘째아들 상호의 묘는 성주군 벽진면 외기리에 있다.

막내아들 상보의 묘는 성주군 가천면 중산리에 있다.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산소도 주변 금수면, 벽진면, 대가면, 가천면, 성주읍등지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이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으며 일부는 대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소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12촌이내의 대소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수군의 선임 장수인 배설장군에게 작전계획을 물었습니다.

배설장군은 나라의 명을 쫒아 수군을 육군으로 편입하여 전쟁을 수행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불청하여 배설장군은 육군으로" 갔습니다. 


통제사가 된 이순신장군이 과거 자신의 휘하 장수가 아닌 배설장군을 자신에게 내려진 '명공육전 명령'(육지 잔병을 규합하라는 명령)을 배설 장군에게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전함을 동생 배즙장군과 수군을 지휘하게 됨을  '재조번방지'라는 고서에서 '배설을 속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배윤호)"

 

 

 

주회 20리, 역모로 몰린 배설 장군에게 내려진 장지의 규모는 임진왜란 참전 모든 장수들이 받은 땅보다 많고  

임진왜란을 패배하게 원인을 제공한 장수에 대한 포상치고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그것도 역모로 참수 되고 6년 만에 선조 대왕 스스로 복권 시킨 후 내린 것이다.


의병장 김덕령이 참수 후 70년 만에 겨우 억울한 점이 서류상 신원된 것과는 비교되어 억울함을 입증하고 있다.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즙 장군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전쟁공포증 환자라는 장계를 모르고 있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탈영보고)

육지에 육군에 자신이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대신 시키면서 병치료를 겸하라고 계책을 논하고는

다시 순군에 돌아오지 못하게  도망쳣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

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배설을 처단하지 않는 조정에 불만을 나타냄



난중일기 해석의 문제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배설의 잘난채 하는 꼴이 맘에 들지 않는 다고 적고있다.

 

유교 국가인 조선 백성에 입장에서 한번 살펴보자. (유성룡 권율 이순신의 친구 입장배제)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 임명장이다.

(선조가 거부했음에도 대신들이 밀어붙여 승지에게 선조가 사죄... 것)

 

그렇지만 선조 임금은 아무래도 8.3 임명장이 자의가 아니었으므로

이순신에게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보냈다.

당연히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다.

 

배설이 당시 수군 책임자로서 그러한 사실을 몰랐겠는가?

(군법에의해 사형수와 같은 죄인을 방면 왕을 기만?)

 

여기에 무효가 된 교류서에 숙배하면

조선 왕의 어명에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왕명을 따르든 배설과 이순신(조정을 장악한 동인의 군부)장군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조선군 최고통수권자인 선조 임금이 5년간 한산도에서 은거한 이순신을 영웅은 크녕 동인들이 전쟁중에도 전권을 놓치 않으려는 발악으로 보고 “칠천량 해전의 대패를 본즉, 우리 수군은 워낙 부실하니 차라리 권율 장군의 육군과 통합하라.” 명령한다.

 

적국을 탐지하라니까 김성일은 거짓말을 하고 전쟁이 나자 또 죄인이 중책을 맡아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한 2년 이면 전쟁이 끝나고 전공을 염두에 두고 인사를 하는 듯하기도 하다.

(호남의 국가 주도권을 상실시킴)

 

 

항명하고 쿠데타를 할 수 있었던 이순신 장군,

왕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이 역모로 몰린 것은 동인군부에 탄핵되었음을 뜻한다.

 

 

 

을미년 4월 난중일기

 

 

초이틀(갑진) 맑음

종일 공무를 보았다.

 

 

초나흘(병오) 맑음

아침에 경상 수사(배설)가 활쏘기를 청하므로 권, 박

두 조방장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수사에게 갔더니

 전라수사(이억기)가 벌써 먼저 와 있었다. 

같이 활을 쏘고 종일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배설이 활쏘기를 청하니, 배를 타고 조방장 둘을 데리고 가서 활쏘기를 시켰다고 추측되는 대목입니다. 배설이 이순신 장군에 무공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활을 가지고 오라고 하니 조방장들에게 활을 들려 술취한 것이죠^^



 

배설 장군의 웅천 해전. 안골포 다대포 해전 승리를 당시 일본측의 기록(케이넌일기. 루이프로스일기, 가토, 요시아키 기타)10여곳의 여러 문헌에 규모가 나와있고 10여 회에 이른 부산해전의 시간 까지 나와있다.



 

당시 3도 수군편제이나 원균은 배설에게만 적을 치라고 허락했기 때문에 전라 충청수군의 전투가 아님은 분명하다고 할수 있고, 10여회의 일본군 14만 대군을 상대로한 전투에서 일본기록 거의 모두가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판단 한점이 특이하다.





"이순신의 정유년 8월 30일자 일기는 훗날 다시 적은 것이기는 하지만,

(일기를 당시가 아닌 훗날 적었다는 것 자체로 이건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또  훗날 공적 다툼 사건에 대처하려는 것이라는 느낌이다. )

 당시에 자신이 배설의 휘하 장수들을 차지하는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배설이 도망치려고 하여서 관하 여러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라고 기록한 내용은 앞에서 권율이 원균을 배제하고 직접 수사들에게 지휘하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휴가를 허락했다”고 적고 있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다.


 이순신은 평소에도 전쟁을 앞두고 도망치는 자를 꼭 잡아서 처벌을 하였다. 그런데 도망치려고 하는 줄 알면서 휴가를 허락했다고 적고 있는 것이 자기 모순이며 또 이틀후 도망쳤다고 적는 것 역시 모순이며,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잡으러 왔을 때 “이미 배설은 성주 본가로 갔다”고 말하는 것 역시 모순이다.



배설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전라도군영으로 갔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무시하고 해전을 감행 하여 명량해전에서 승리후 조정에 배설에 대해서 도망쳤다고 보고 하였지만 일기에는 그보다 앞선 9월 2일에 기록으로 남겼다.

 

1,명량해전이 대승이라고는 하지만


현무공실기에서는 “그 공은 절반은 장작구선에 있다”고 적고 있어서 배설의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나온 전함 8척과 그후 수습한 4척의 공이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나 선조실록에는 명량해전 승전 기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이순신이 선조의 육군으로 편입하라는 명을 어겼기 때문일 수 있고 배설의 탄핵을 위해서 보고를 하지 않았을 수 있다.

또 권율도 과거 원균 때와는 달리 이순신의 조정의 명령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책을 한 내용은 찾아 볼 수 없다.



2, 이순신이 배설에 대해서 도망 쳤다는 이야기는?


난중일기에 배설이 ‘도망갔다’는 이야기는 이순신이 곤양에 처음 도착하여서 자신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다음날 배설이 나타남으로써 전날의 ‘도망갔다’는 기록은 틀린 기록이다. 이순신은 매일매일 일기를 쓰지 않았음에도 다시 8월 25일 군대인심이 이제 안정되었다고 하면서 “배설은 이미 도망갔다”고 적었다.


이날 군대내 인심이 안정되었다 함은 배설이 갖고 있던 군권이 자신에게로 넘어 왔음과 군대내 보급품의 원할한 공급을 말한다. 배설이 지휘하고 있을 때는 보급품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고 김억추장군은 증언하고 있다.(현무공실기)


그러니 자신이 배설을 완전히 축출하였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기록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틀 뒤 배설이 이순신의 눈앞에 다시 나타나면서 이 내용도 허위이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줄로 알고 도망간 것으로 일기에 기록을 했지만 다시 나타났으니 불편하다. 그래서 ‘어디로 피해갔던 것 아니냐’라고 했다고 기록 했다.



그리고 30일에는 아예 ‘근심하고 도망가려고 하여’라고 적으며 빨리 떠나기를 바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 관하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고 적고 종이 소지를 보내서 ‘휴가를 허락’했다고 적었다.


이것도 조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이순신은 현무공실기에서

 안위가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잡아다가 참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왜 배설이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냥 두었을까? 이틀후 다시 ‘도망쳤다’고 적고 있는데 이 8월30일자 일기는 처음 쓴 1책에는 없었으나 10월 8일 이후 다시쓴 2책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렇지만 후세와 오늘날 필주자들은 이러한 날조된 기록을 가지고 배설장군을 비겁하고 도망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11월 3일자에서 말하고 있다. 이순신은 당시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잡으러 왔을때 ‘배설은 이미 성주 본가로 갔는데’라고 말하였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배설은 노량해전에서 동생 배즙장군이 전사하기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칠천량해전의 패전 책임이 선조실록 정유년 7월22일에는 권율에게 있다고 규정했지만 다음 8월 5일자에서는 앞전에 올라온 장계들의 내용은 모두 무시하고 권율이 다시 조사하여 올린 장계에 의하여 배설과 배흥립에게 책임이 물어진다.

 

이 자리에서 배흥립은 바로 군율로 처리하고 배설을 바다에서 주사로 영솔하고 있으니 훗날 처치하라고 한다. 그런데 바로 군율로 처하라고 한 배흥립은 이순신이 배설의 부대 군권을 쟁탈할때 이순신과 늘 함께 하고 있었던 내용이 난중일기에 배동지, 배백기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그후 배흥립은 이 일로 처벌 받지 않았다.

 

물론 배설도 칠천량전투의 책임으로 처벌 받을 이유가 없었다. 배설에 대한 탄핵은 단지 당시 병조판서인 이항복의 장인이며 도원수인 권율을 살리기 위함 이었고 배설을 두려워하는 조정 대신들의 모함 때문이었다.


3, 배설은 왜 바로 체포되지 않았는가?

칠천량 전투에 패전책임 으로는 배설을 죽일 수는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망이라는 죄목을 하나 더 덧붙여서 10월 11일 선조실록에 두 번 도망친 죄인으로 만들어 탄핵을 한다. 이에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체포하러 이순신에게 갔다. 그리고 정황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 후로는 성주로 체포를 하러 갔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이길원이 이순신을 만나서 당시의 사정을 당연히 파악 하였을 것이다. 지금 필주자들에 의해 알려진 것 처럼 배설이 전쟁중 비겁하고 겁이 많아 도망쳤다면 바로 이길원은 배설을 체포하여 처벌 받도록 하였을 것이고 처형후 선조에 의하여 선무원종1등공신으로 책록 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전쟁은 끝이 났고 배설은 그간의 두 번이나 도망자로 만들어서 탄핵을 했지만 이것으로는 죽일 죄목이 되지를 못한다. 전쟁에서 많은 용장들이 죽어서 이제 배설이 재기용되는 일만 남았다. 배설을 모함 하였던 조정대신들은 배설이 군권을 장악하는 일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막아야 한다.


선조실록 (1598.12.23) 병조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뒤 국내 변란을 우려하여 배설을 탄핵 - 이순신은 죽고 없는 마당에 배설의 재기용에 따른 불안감을 국내 변란으로 무함하여 탄핵함. 이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안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라 배설의 용맹과 지략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배설이 재기용 되는 것은 자신들에게는 당연히 변란으로 받아들이게 됨.

배설장군을 모함했던 정인홍은 그후 수차례 탄핵을 받아 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88세에 참수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배설을 탄핵했던 홍여순은 훗날 1609년 귀양지 진도에서 백성들에게 맞아서 죽었다.

그러나 배설장군은 1605년 4월 선조에 의해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어 억울한 죽음이 신원 되었다."



4,현무공실기에 나오는 교서 내용(참고자료)

“교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유서, 네가 한지방을 수임하니 책임이 중하다. 무릇 군사를 발하여 규율에 응하여 백성을 편케하고 적을 막는데 일응 평상사는 스스로 정한 법이 있거니와 혹 내가 너에게 독단처사 하는 권한을 줄 때에는 밀부(密簿)가 아니거든 시행치 말 것이며 또 의외의 간모를 예방하여야 할 것이고 만약 비상의 명이 있을 때 에는 병부를 맞추어 보고 의심이 없는 년후에 마땅히 명령을 집행해야 하겠기에 압 제 二十六부를 주노니 너는 받으라 그러므로 이르노라.”(만력26년 선조31년 12월 29일)



현무공실기 행술편에 나오는 배설관

냠냠냠 센스! 힝~ 누구? ... 좋아 애도 주식 대한민국 릴랙스 갈래말래 더워 해피cgi 추워요 훗 샤방 해피 화남 훌쩍 >_< 깜빡 소주 반대 찬성 완소 흑흑 헐 ^^ ye~ 굿 복받으세요 미스터 미세스 미스 헉! 후덜덜 덜덜덜 뷁 캬캬캬 아자 뭐죠? 사랑 필요없다 지구를떠라 필승 캬캬캬 지름신 고맙습니다 완전조아 자기야 빠팅 니들이알어 므흣 뭐라카노 추워 하이 ㅋ 사랑해 화이팅 아자아자 쌩큐 힘내 열폭 오늘 하하하 하앙 킹왕짱 뭐니 듣보잡 ok so hot 신상품 2009
패스워드 패스워드를 입력하세요.
도배방지키
 39104174   보이는 도배방지키를 입력하세요.
추천 소스보기 답변 수정 삭제 목록
이전글 : kbs; sunghoomo,news랩 ▽◇ (2018-02-11 19:55:17)
다음글 : 국민이 모르는 국회의사당의 비밀 10가지〓◑ (2018-02-11 20: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