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의 추한 성매매 의혹으로 영화 <내부자들>이 다시 화제다. 대기업 회장과 집권당 대통령 후보, 신문사 논설주간이 ‘주지육림’을 즐기는 장면이 새삼 구토를 일으킨다. 박근혜 정권의 고위관료가 뱉은 ‘개돼지 발언’의 출처이기도 하다.
영화 속 ‘조국일보’ 논설주간의 개돼지 발언은 이어지는 대사까지 ‘압권’이다. ‘적당히 짖다가 알아서 조용해진다’가 그것이다. 혹 저들은 개돼지들의 들끓던 분노가 공직자 파면으로 조용해졌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진 않을까 두렵다. 이건희 의혹으로 <내부자들>이 다시 들먹여지지만, 관심은 이미 ‘개돼지’에서 ‘성’으로 옮겨갔다고 판단할 법하다.
이건희 성매매 의혹을 ‘뉴스타파’가 보도할 때, 나는 미국 워싱턴의 링컨기념관에 있었다. 백악관보다 더 웅장한 대리석 건축물에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배경으로 링컨이 앉아 있다. 연설문의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부’ 대목에서 그 민중을 개돼지로 경멸한 정부의 관료가 새삼 떠올랐다.
오해를 감수하고 고백하거니와 ‘민중은 개돼지’라는 발언이 신문과 방송에 처음 보도될 때, 나는 한편으로 반가움마저 느꼈다. 오랜만에 ‘민중’이란 말을 미디어로 만나서였다. 1980년대에는 자연스레 들린 ‘민중’이 어느새 거북한 까닭이 미디어에 있기에 더 그랬다. 1990년대로 들어서며 지면과 화면에서 ‘민중’은 시나브로 사라졌다. ‘주류화 현상’에서 배제된 셈이다. 실제로 ‘민중은 좌경화 개념이니 더는 기사에 그 말을 쓰지 말라’는 경고가 당시 ‘유력 신문’ 편집담당 상무의 입에서 무람없이 나왔다. 민중언론을 약속한 신문사 지면에서도 ‘민중’은 슬금슬금 사라졌다.
신문 표제나 방송자막에 큰 글자 ‘민중’이 나온 것은 근 20년 만이 아닐까 싶다. 다만 ‘역사의 주체’는 긴 공백기를 지나 어느새 ‘개돼지’로 조롱받고 있다. ‘민중언론학’을 제안한 학술서에서 누리꾼이 곧 21세기 민중임을 밝히며 ‘누가 그들을 멍청하게 만드는가’를 파고든 나로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망언이다. 대한민국 교육부 관료에 따르면, 학계에 몸담은 뒤 애면글면 다듬은 민중언론학의 논리는 결국 개돼지의 학문인 셈이다.
차분히 묻고 싶다. 민중은 먹고살게 해주면 짖지 않는다는 발상은 한 관료만의 일탈일까. 아니다. 거만한 언행은 ‘언론 권력’의 편집 틀과 이어진다. 민주화운동을 매도하고 군부독재를 찬양했던 확성기들은 지금도 자본독재의 앞잡이가 돼 민중운동을 공격하고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임을 간파한 오만과 먹고살게 해주면 된다는 논리가 독과점 미디어에 숨어 있다.
인간에게 모든 걸 바치는 실제 개와 돼지에게 미안함을 전제하고 쓴다. 사람을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낮춰보며 온갖 추잡한 언행을 일삼는 자들이야말로 실은 개와 돼지 아닌가. 군부독재와 자본독재를 대변하며 제 잇속을 챙겨온 언론도 그 ‘내부자’다. 링컨의 문법으로 말하자면 개돼지의 개돼지에 의한 개돼지를 위한 미디어다. 지구에서 노동시간이 사실상 가장 길고, 비정규직이 가장 많고, 대학등록금이 가장 비싼 나라에 우리 민중이 살고 있는 현실은 필연이다. 개돼지의 언론은 실제로 민중을 개돼지로 만들 수 있다.
다행히 우리 근현대사에는 개돼지의 언론만 있지 않았다. 민중언론의 꿈을 이루려는 열정과 희생이 신문과 방송에 연면히 이어졌다. 동아투위는 물론, 지금도 권력의 입김으로 해직된 방송인들이 개인적 고통을 이겨내며 방송 3사나 종편 따위와 사뭇 격이 다른 ‘뉴스타파’를 일궈가고 있지 않은가.
정보과학기술 혁명으로 누구나 언론 활동을 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말 그대로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언론을 펼칠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그럼에도 민중을 경멸하는 고위공직자들이 나타나고, 오월항쟁에 ‘북괴’가 개입했다는 주장을 대학교수까지 공공연히 부르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딴은 대통령부터 얼마나 민중을 우롱해왔던가. 박근혜가 여론 수렴 없이 사드 배치를 미국과 결정한 뒤 국익을 내세워 단합이란 이름의 순종을 강요하거나, 민생을 부르대며 일반 해고를 관철하려는 고집은 해외여행만 즐기는 대통령이라는 날 선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그 여행의 모든 경비는 해고 위기에 내몰린 노동자들까지 예외 없이 내는 세금에서 나온다.
지금 여론지형은 개돼지의 개돼지에 의한 개돼지를 위한 언론과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언론 사이에 있다. 앞으로 누가 여론을 주도해갈 것인가는 개와 돼지들에 달려 있지 않다. 민중이 좌우한다. 민중언론은 21세기 민중인 누리꾼이 스스로 민중임을 깨닫는 곳에서 열린다. 적당히 짖다가 조용해지는 그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