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일본인(日本人)들의 신앙상태(信仰狀態)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은 과거 백제로부터 불교를 전래받아 불교(佛敎-buddhism)를 매우 숭상하여 왔는데, 순수 불교는 49%,신도50%,신 구교1%미만으로 변동없이 일정하게 나타납니다.신도(神道)는 토속신(土俗神)과 불교 여러 종파 가운데 고착화된 특유의 것이 융합되어 신사(神祠)에 조상(祖上)과 천황(天皇)을 신(神)으로 모셨으나, 다른 나라처럼 정교일치(政敎一致)를 하지 않은 점이 특징이고,헤이안(平安) 시대에서는 막부(幕府)와 지방 영주(領主)가 많이 보호하여 일본 천황은 정치와 종교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여 대다수 일본 국민(一本國民)들의 가슴 속에 천황을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서양 중세(西洋中世)에서 암흑시대(medie-val dark age)를 벗어나고자 교황의 절대권위(絶對權威)에 대항하는 종교혁명(宗敎革命) 전후 무렵,카톨릭의 포교를 위해,1549 년 포르투갈의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co xavier)가 가고시마(鹿島)에 와서 신도 사원(神道祠院) 내에서 포교(布敎)하기 시작하여 급속히 번지기 시작해서 16 세기 말에는 20 만 명을 육박하였다.선교사들은 그들의 발달한 과학지식인 천체(天體)와 기상현상(氣象現狀)을 미끼로 하여 대다수의 환영을 받았다.당시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全國 統一)을 통일하였음에도 사(武)무라이 중심으로 군부를 확장하고 있었다.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꾸가와 이에야스(悳川家康)는 1592 년 중국의 화약과 철포및 조총(鳥銃)으로 무장하여 부산 동래성에 입성한지 불과 한 달도 안되어 충주 지방까지 손쉽게 침략하였다.
-서양은 종교개혁을 위한 혁명으로서 저항자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즉 신교(新敎)의 대두로 위협을 느낀 카톨릭은 예수회 조직(society of jesuit))을 세워 내부 단속과 함께 해외 포교에 노력하여 일본 가고시마(鹿島)와 규우슈우(九洲),시고꾸(四洲)에 주로 포교활동을 하여 왔으나 일본 위정자들은 일부 묵인하ㄴ가운데 히데요시 등은 이러한 예수회 활동을 탄압하였다.1637 년까지 40여 년간 놀랄만큼 교세를 확장하면서,일본에게는 가볍고 휴대하기 쉬우 조총을 전수받아 군비확장(軍備擴張)에 기여하였다. 1637 년 시마바라(島原) 난 이후 카톨릭은 지하종교(地下宗敎)가 되었고 ,1650 년 쯤 영국과 네덜랜드가 등장하여 식민주의(植民主義-colonialism)에 위협을 느낀 위정자들은 카톨릭 선교사(宣敎士)들을 사형시키기 시작하였다.에도(江湖)시대에는 일본이 안정을 찾아 평화,번영,점진적진보를 향해갔고, 250년 후에는 유럽의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으로 구미 열강(列强)들은 다시 일본을 찾아 쇄국(鎖國)하던 일본에게 서양풍과 각종 문화가 많이 들어왔다.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일본이 유럽보다 뒤떨어졌음을 알고 급진적으로 서구화(西歐化)를 결정하여 문물이 더욱 쇄도(殺到)되었다.화혼양재(和魂洋才)와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슬로건 아래 서양의 장점만 을 일본식(日本式)으로 개량 발전(改良發展)시켰고,탈아입구는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의 지속으로 일본의 장군(將軍),영주(領主),막부(幕府)들이 다투어 일본왕을 천황으로 공고(鞏固)히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 구로다 요시다따(黑田吉隆),가또오 끼요마사(加藤)淸正) 등 대다수 장졸들은 카톨릭 신봉자였고 세스페데스(cespedes) 신부를 대동하여 조선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일본군은 육군 16만 명,수군 6만 명,배 700 척을 이동하였고, 이웃 일본의 침략의도를 사전 간파(事前看破)하지 못한 조선은 고작 8만 명의 군인이 전쟁에 임하여 연전연패하였으나,해전에서만 이순신이 홀로 25전 25승 무패로
남해(南海)바다를 굳건히 지켰다. 일본은 자기네의 고유신앙인 신도와 전래 불교를 지켜 일본 정토신앙(淨土信仰)으로 토착화하여 일본인 특유의 굳건한 정신을 잘 유지시켰으며,다른 한편 카톨릭을 탄압하는 가운데 신자들을 방치하여 침략의 도구로써 응용하고 서양문물을 전수받는데 교묘히 이용한 것이 오늘날의 일본 선진화(先進化)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