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경제적 자립위해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을 육성시켜 세계적 규모의 철강업체 기반을 다짐
- 1968년에 포항제철이 설립되어 1973년부터 조업을 시작한 이후, 한국 경제 발전과 중화학공업의 근간을 이루며 포스코는 세계적 규모의 철강업체로 발전했다. 포항제철이 건설되기 이전, 우리의 철강 산업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립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제일 먼저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의 육성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이는 1965년 존슨 미국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면서 피츠버그 철강공업지대를 시찰하고,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의 포어 회장을 만나 사업 실현에 필요한 외자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 제철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66년 12월, 미국의 코퍼스를 중심으로 5개국 8개사가 참여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그러나 1968년 세계은행(IBRD)은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이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국의 제철소 건설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고, KISA도 차관도입에 난색을 표함으로써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제철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결국에는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규모의 철강업체를 만드는 데에 기반을 닦았다. 이 세계적인 포항제철은 박정희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철산업의 적임자를 찾던 중 박태준을 떠올렸고, 즉시 그를 청와대에 불러 포항제철소 건설을 부탁했다.
박태준도 부담이 되서 여러 차례 거부를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고 끝내 박태준이 포항제철을 건설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는 원래 KISA가 한국에 조강 능력 6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1972년 9월까지 완공하며 300만 톤까지 철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하기로 했다.
또한 건설 자금은 총 1억 3,070만 2,000달러이며, 그중 외자는 무려 9,570만 2,000달러, 내자는 3,500만 달러였는데 외자 지급이 거부된 것이다. 하지만 이 자금은 바로 한일협정 청구비용에서 충당하게 되었고, 포항제철 건설은 국제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경제기획원은 전담반까지 설치하면서 포항제철 건설을 지원했다.
이렇게 1970년 4월 1일 착공식이 거행되었고, 드디어 포항종합제철의 1기 용광로 공사가 완공되어 점화로에 불을 붙였다. 쇳물이 나오기까지 21시간이 걸렸고, 마침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한반도 포항에서 최초의 쇳물이 쏟아진 것이었다. 이 포항제철은 일관제철소 설비를 가동시킨 지 단 1년 만에 그동안 투입된 외국자본을 모조리 갚고도 남는 4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박정희의 전적인 지원과 격려, 그리고 박태준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포항제철은 선진국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준공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이후 포항제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적자를 낸 적 없는 국가의 중요 수출산업으로 성장했다. 조강 생산능력은 세계 1, 2위를 다투는 등 국가 발전의 최고 핵심산업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이라는 포항제철을 건설한 CEO의 위대한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결단력과 포항제철 창업단의 불도저와 같은 리더십, 포항제철은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가 밑바탕이 되어 이제는 세계 굴지의 제철공장이 되었다. 포항제철의 성공은 단순하게 포항제철의 성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포항제철은 국내의 철강산업을 선도하면서 한국경제를 선두에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