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제1공화국
-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중에서 <역사학자 서중석>
이승만 권력과 박정희 권력의 유사성과 상이점
이승만 정권을 이해하는 데는 박정희 권력과 비교하는 것이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먼저 비슷한 점을 살펴보자.
이승만과 박정희 모두 다 1인 절대권력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거추장스럽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삼권분립이나 다당제, 선거 등을 없앨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형해화하거나 1인 체제에 봉사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입법부가 거수기 역학을 하는 것은 이승만 정권에서는 빨라야 1953년 이후로 잡을 수 있고, 그 이후에도 자유당의 일부 의원은 여러 차례 ‘반란표’를 던졌다. 민주공화당에서도 때로는 반란표가 나왔지만, 박정희는 이승만보다 훨씬 가혹하게 반란표를 던진 의원들을 닦달했다. 사법부의 경우 김병로가 대법원장으로 있을 때는 이승만이 통제하는 데 제약이 있었다. 군사정권 시기부터 사법부는 무력했지만, 사법부가 박정희 권력의 요구에 적극 순응한 것은 1971년 사법부 파동 이후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자유당 창당의 주역인 이범석을 부산정치파동에서도 최대한 활용했지만, 8.5 정부통령 선거부터 견제하기 시작했다. 선거가 끝나자 이범석은 해외로 나갔고, 평당원이 되었다가 그의 동지들과 함께 ‘민족분열자’ 로 출당, 제명 처분당했다.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창당 주역이지만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나야 했고, 계속해서 자기 세력이 숙청당하는 것을 목도했다. 3선 개헌을 거치면서 주류=김종필계라는 것은 소멸했고, 1971년 10월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결의안 통과와 함께 비주류 보스들이 사라졌다. 이후 민주공화당은 중간 보스가 없어졌고, 이른바 박정희 친정제제로 들어갔다.
자유당과 민주공화당은 다른 점도 많지만 유사한 점도 많다. 둘 다 관제정당이었다. 창당 과정도 그렇지만, 당을 확장하고 유지하는 데 모두 다 관권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자유당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을 주요 기반으로 하면서 국민회, 대한노총 등 5개 단체 등이 부분적으로 가담해 창당을 했는데, 민주공화당은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만들어졌고, 증권파동 등 4대 의혹사건에서 거둬들인 자금이 주요 창당자금이 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양당 모두 지도자를 위해서 만들어졌고, 유일 지도자가 거세되면서 소멸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지만, 자유당이 더 이승만의 사당(私黨) 역할을 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권력의 분점을 용납하지 않았거니와, 그것의 자연적인 귀결로 영구집권을 꾀했다. 이 때문에 둘 다 선거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고, 관권을 동원했다.
두 사람은 영구집권을 위해 개헌을 거쳐야 했는데, 이승만 집권 6년만에 치러진 사사오입 개헌과 박정희 집권 8년 만에 치러진 3선개헌은 개헌 전에 두 사람 다 미국에 다녀왔으며, 개헌안은 억지로 통과시켰다는 점에서도 유사한 점이 있지만, 개헌에 필요한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심한 부정선거를 획책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1954년 5.20선거가 어떻게 치러졌는지도 이미 언급한 대로이다. 1967년에 치러진 6.8국회의원 선거는 망국선거라는 비판을 받았고, 이 때문에 국회가 장시간 공전되었으며, 박정희는 민주공화당 당선자 여러 명을 잘라내야 했다. 6.8선거는 장관 등 특별공무원의 선거 운동으로 처음부터 물의를 빚었고, 이와 관련해 선거법시행령이 고쳐졌는데, 특히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전국 각지를 다니며 선거운동을 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냉전체제에 철두철미 순응하고 그것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했으며 극단적인 반공정책을 폈다. 두 사람 다 미국의 국가 이익을 한국의 국가 이익과 등치시켰고, 미국에 대한 비판을 국가보안법으로 엄혹하게 단죄했다.
이승만은 국제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반공 지도자로 부각되었고, 국내에서는 세계적인 위대한 반공지도자로 선전되었다. 이승만은 인도차이나 문제가 발생하자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미국에 제의했다. 박정희는 서방 세계의 강력한 비판에 직면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확전을 적극 지지했고,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지상군을 파견했다.
두 사람에게 북은 타도, 절멸의 대상이었고, 대화, 공존의 상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1950년대 내내 학생, 노총조합원, 공무원, 시민 등을 동원해 북진통일운동을 폄으로써 평화통일 주장을 차단했고, 자신의 권력과 극우반공주의를 강화했다. 박정희는 1960년대에 선건설을 내세워 통일문제를 논의하는 것조차 금지했고, 유신체제에서는 1960년대보다 훨씬 극단적인 반공, 반북 선전활동을 벌였다.
이승만의 극우반공체제는 제주 4.3항쟁과 여수 순천 사건에서의 주민집단학살, 전쟁 초기 보도연맹원의 대규모 집단 학살, 11사단에 의한 거창, 산청, 고창, 함평 등지에서의 주민집단학살을 거치면서 공고해졌다. 특히 보도연맹원 학살은 남한 곳곳에서 발생해 동시대인이 목도했던 바, 이승만 정권=반공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체념을 심화시켰다.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은 쿠데타군은 통일운동, 반매판운동을 벌인 혁신계와 학생들을 대거 체포해서, 소급 입법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만든 ‘특수범죄처벌특별법’을 적용해 중형을 선고했다. 쿠데타 주모자들은 또한 피학살자유족회 관계자들을 체포했고, 거창 등지의 피학살자 합동묘소를 파해쳤다. 그리고 중앙정보부를 설치해 국민을 감시했다.
이승만은 극우반공주의자들조차 빨갱이로 몰아세웠는데,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전가의 보도를 빼들었다. 그는 4월 13일 담화에서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가 있다” 라고 주장하고, 마산 시위는 “결국 공산당에 대해서 좋은 기회를 줄 뿐” 이라고 협박했다.
4월 15일에 발표한 제2차 담화문에는 더욱 섬뜩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는 이 담화에서 역시 공산당 혐의를 주장하고는 “과거 전남 여수에서 공산당이 사람들을 많이 죽였을 때...... 조그마한 아이들이 일어나 수류탄을 가지고 저의 부모에게까지 던지는 불상사는 공산당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것” 이라고 피력하고는 공산당은 “부모도 어른도 아이도 모르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짓을 자행하며 오히려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 이라고 역설했다.
여순사건에서 아이들이 수류탄을 부모에게 던진 예나 그와 유사한 예는 지금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1970년대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부모도 아이도 모르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오히려’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자행한다는 이승만의 이 담화가 결코 낯설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1970년대 초등학교 복도, 교실 벽에 잔뜩 붙어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