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사도세자 묘지문에서 직접 밝힌 죽음의 이유
[한겨레] [역사 속 오늘] 18년 전인 1999년 12월 1일
사도세자 죽음 237년 만에 영조가 쓴 묘지문 공개돼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
-사도세자의 묘지문 중
정확히 18년 전인 1999년 12월 1일, 사도세자가 비극적 죽음을 맞은 지 237년 만에 그의 묘지문이 세상에 공개됐다. 묘지문이란 죽은 자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보통 무덤에 함께 매장된다.
사도세자 묘지문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둘 것을 명령해 끝내 파국으로 몰아간 아버지 영조가 임오화변(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며칠 뒤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2달 뒤 ‘직접’ 썼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묘지문의 내용이었다. 그동안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쓴 회고록인 <한중록> 등에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심정 등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공개되기까지
사도세자 묘지는 1968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29-1번지 배봉산에서 출토된 문화재다. 사도세자의 능은 그의 아들인 정조가 비극적 죽음을 맞은 아버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1796년 원래의 배봉산에서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화산 기슭의 현릉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묘지석은 그 당시 수습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이후에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배봉산은 사도세자를 “7월 23일 양주 중랑포 서쪽 벌판에서 매장하노라”라고 적은 묘지문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장소다. 묘지석의 외형은 가로 16.7㎝, 세로 21.8㎝, 두께 2.0㎝의 청화백자로 만든 사각형 판석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5장씩 2벌 모두 17장이 출토됐다. 2벌은 묘지석 크기와 묘지문 내용까지 모두 동일하다.
묘지석은 오른쪽에는 ‘사도세자 묘지’라고 쓰여있고, 왼쪽에는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등으로 순서가 매겨져 있다. 지문은 장마다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8행 15자를 기본으로 한다.
묘지석은 1979년 국고에 수입된 뒤, 1989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행한 책자인 <중요발매장문화재도록>을 통해 그 존재가 알려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한 채 발굴된 모습 그대로 수장고에 보관돼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그 사료적 가치에 주목해 깨진 지석들을 접합하고 보존 처리한 뒤 1999년 12월 1일부터 한 달간 일반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세간의 큰 반향이 일어났다.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제1장
사도세자는 이름이 훤이고 자가 윤관으로 영조 즉위 을묘년 (1735) 1월 21일 영빈의 아들로 탄생하였다 .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는 글월에도 통달하여 조선의 성군으로 기대되었다 . 오호라 , 성인을 배우지 아니하고 거꾸로 태갑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웠더라 . 오호라 , 자성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것을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 .
‘어제지문’으로 시작하는 묘지는 내용상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어제’는 임금, 즉 영조가 직접 썼다는 뜻이다. 먼저 제1장의 6행까지의 첫 번째 부분은 세자의 탄생과 유년기의 총명함을 기리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나 영특했고 장성해서는 문리가 통달하여 성군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성인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방종을 일삼아 계도하려고 했으나 제멋대로 소인들과 어울려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여기서 언급된 ‘태갑’이라는 인물은 고대 중국 은나라 성탕왕의 손자다. ‘태갑’은 무도(말이나 행동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나서 막됨)하여 신하에게 멀리 추방당했다가 허물을 고친 뒤 다시 복위되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그렇게 되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맞았다.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
-제2장
아 !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둘이오만 , 세자 시절에 이와 같다는 자의 얘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노라 .
그는 본래 풍족하고 화락한 집안 출신이나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 . 지난 세월에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태갑이 일깨워주는 큰 뉘우침이었지만 ,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 오호라 , 아까운 바는 그 자질이니 개탄하는 바를 말하리라 . 오호라, 이는 누구의 허물인고 하니 짐이 교도를 하지 못한 소치일진대 어찌 너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 오호라 , 13일의 일을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 만약 네가 일찍 돌아왔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으랴 .
제2장 3행까지로 이뤄진 두 번째 부분에서는 고인의 덕과 위업을 기리는 내용 대신 세자의 비행과 방탕함에 대해 고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영조는 예부터 무도한 인군은 많았지만, 세자 때에 이와 같이 무도한 경우는 듣지 못했다고 탄식한다. 세자를 뒤주에 가둔 이유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밝히는 부분이다. 그러면서 사도세자를 두고 아들을 뒤주 속에서 죽게 해 세상에 없던 일을 아비에게 행하게 했다며 통곡했다. 그리고 그 잘못은 제대로 가르쳐서 이끌지 못한 아버지인 자신에게 돌렸다.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가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제3장
강서원에서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한 것이겠는가 ? 백성을 속이는 것일지니라 . 생각이 이에 미쳐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 .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 . 때는 임오년 여름 윤 5월하고도 21일이라 . 이에 다시 예전의 호를 회복하게 하고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여 사도라 하겠노라 . 오호라 , 30년 가까운 아비의 의리가 예까지 이어질 뿐이니 이 어찌 너를 위함이겠는가 ? 오호라 , 신축일의 혈통을 계승할 데 대한 교시로 지금은 세손이 있을 뿐이니 이는 진실로 나라를 위한 뜻이니라 .
제3장 5행까지로 이뤄진 세 번째 내용은 이 묘지문의 절정이다. 사도세자가 숨진 임오화변의 간략한 전말과 아버지인 자신의 비통함을 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