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법은 ‘종교 전쟁’이었나?
부정부패와 조직범죄를 키운 금주법
미국의 금주법 시대는 1920년에서 1933년까지의 14년 간이지만, 금주를 법으로 강제하고자 한 시도는 영국의 식민지 시절인 16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매사추세츠 의회는 독주의 판매를 불법화했다. 독립 후에도 금주를 법제화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루어졌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민자가 대거 유입되면서 술 소비량은 더욱 늘어나, 1830년경엔 미국 성인 1인당 1주에 1.7병의 술을 마시는 걸로 나타났다. 이는 2010년 술 소비량의 3배에 이르는 수치였다. 1826년 보스턴에서 결성된 미국금주협회(American Temperance Society)는 ‘술과의 전쟁’을 선포했는데, 10년 후 회원이 150만명에 이를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840년대부터는 감리교가 중심이 된 종교단체들이 전면에 나서 ‘술과의 전쟁’을 주도하였다.
이런 일련의 전쟁 덕분에 1851년 메인주가 미국 최초로 금주법을 시행할 정도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남북전쟁(1861-1865)으로 인해 금주운동은 쇠퇴기를 맞았다. 금주운동은 1869년 금주당(Prohibition Party)이 창당되고, 1873년 기독교여성금주회(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가 발족해 미국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조직으로 자리 잡으면서 다시 활발해졌다.
1881년 캔사스주는 미국 최초로 금주법을 주 헌법에까지 삽입시켰고, 이후 남부의 주들이 하나 둘씩 금주법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조지아주에선 1886년 7월부터 금주법이 시행되었는데, 이 시기에 조지아주에서 탄생한 코카콜라는 1886년 4월 신제품 발표시 금주법 시행을 염두에 두고 ‘나의 금주용 음료’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코카콜라는 나중에 연방 차원의 금주법이 시행되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맞게 된다.
남부의 주들에서 금주법이 제정되었다곤 하지만, 잘 지켜지진 않았다. 기독교여성금주회 회원들은 금주법 준수를 감시하는 운동을 벌였는데, 이 때에 혜성처럼 등장해 미국 금주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도끼의 여왕‘ 캐리 네이션(Carrie Nation, 1846-1911)이다.
네이션의 첫 남편은 알콜 중독으로 사망했다. 그런 이유로 네이션은 술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1899년 6월 5일) 금주운동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올리던 중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그 계시의 내용은 술집을 때려 부수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돌로, 그러다가 나중엔 도끼를 썼다. 덩치도 큰(키 180cm, 몸무게 79kg) 네이션이 도끼를 휘두르면 술집 주인들은 기겁을 하면서 내빼곤 했다.
기독교여성금주회 회원들은 네이션의 지휘아래 도끼를 들고 “때려부수자, 여성들이여 때려부수자!”를 연호하며 캔자스의 술집들을 습격해 모조리 박살내곤 했다. 네이션은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찬송가를 부르거나 기도를 올렸다. 다른 동료 회원 없이 단독으로 습격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1900년에서 1910년까지 도끼질로 인해 경찰에 30번 이상 체포되었지만,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네이션은 도끼와 벽돌을 마차에 가득 싣고 캔자스를 넘어 일리노이, 오하이오, 뉴욕주까지 쳐들어 갔으며, 자금 조달을 위해 강연 활동과 더불어 자신의 사진과 판지로 만든 기념 손도끼를 팔기도 했다.
네이션의 도끼질을 비롯한 금주운동이 효과를 낸 걸까? 1920년 1월 16일부터 미국 영토 내에서 0.5% 이상의 알코올이 포함된 음료의 주조, 판매, 유통이 불법화되었다. 이미 그 전에 ‘바이블 벨트(Bible Belt)’로 불린 남부의 주들을 포함하여 자체적으로 금주법을 제정한 주가 24개에 이르렀지만, 이 불법화는 전 연방 차원의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전시금주법은 이미 상정되어 1919년 7월 1일부터 실시될 예정이었지만, 이걸로도 부족하다는 듯 금주법을 영구적이며 실효성 있게 만들 수정헌법 제18조가 1917년 말에 의회를 통과하여 많은 주에서 전쟁 종결 이전에 승인되었고, 1919년 1월 주의회 개회에 따라 이 조항의 승인 촉진운동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종전 후 9주도 채 지나지 않은 1919년 1월 16일 수정헌법 통과에 필요한 36개 주가 수정안을 비준했다.
처음에 동의하지 않은 나머지 주들도 두 주를 제외하곤 모두 금주법을 재가했다. 오로지 코네티컷주와 로드아일랜드주만이 금주법의 영역 밖에 있었다. 수정헌법 제18조는 이미 인준되었기에, 주류판매반대연맹(Anti-Saloon League)의 원안에 따라 기초된 수정조항 시행법 은 신속하게 통과되었다. 이 법은 이 법안의 주창자인 미네소타주의 공화당 하원의원인 앤드류 볼스테드(Andrew Volstead, 1860-1947)의 이름을 따서 ‘볼스테드법(Volstead Act)’으로 불렸다. 이 법이 1920년 1월 16일부터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금주법은 “타협은 없다”는 전시체제 정신의 조류에 편승한 것이었지만, 꼭 전시체제 때문만에 생긴 건 아니다. 금주운동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음주운동을 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정치인들은 속마음이야 어떠했건 공식적으로는 칼뱅과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옹호자로 비쳐지길 원했기 때문에 그런 금주운동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다.1)
원초적으로 지켜지기 어려웠던 법
미국의 금주법 덕분에 재미를 본 건 금주법이 없는 인근 국가들의 술 제조·판매업자들이었다. 금주법 시행 초기엔 애주가들을 위해 플로리다와 카리브해를 잇는 항공노선까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외 원정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금주법은 원초적으로 지켜지기 어려운 법이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임명한 금주법 단속요원은 1920년에 1,520명, 1930년에도 2,836명에 불과했다. 수도 적은데다 급료도 낮아 매수되기 일쑤였다. 여론의 지지나 있으면 그들이 자존심으로 버텼을텐데 여론은 변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 역사가 프레드릭 루이스 알렌(Frederick Lewis Allen, 1890-1954)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금주법의 논리는, 우드로우 윌슨을 패배시키고 매너와 도덕의 혁명을 촉진시킨 바로 그 감정적 이완과 맞닥뜨렸다. 사람들은 고귀한 이상에 이바지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에 넌더리가 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을 영웅이 살기에 적합한 곳으로 만드는 데에도 지쳤다.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본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금주법에 대한 감정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불과 수개월 사이에 볼스테드법은 좌우에서 난타당하고 있었고, 전에는 미미했던 금주법 반대 여론이 꽤 큰 비중으로 커가고 있었다.”2)
그렇게 반대 여론이 높다면 법을 바꾸면 좋으련만, 미국인들은 법을 바꾸지도 않은 채 그저 몰래 술을 마셔댔다. 1925년 단속 총괄 책임자인 재무차관 링컨 앤드류스(Lincoln C. Andrews, 1867-1950)는 단속요원들의 적발 비율이 밀수입 되는 술의 5%에 불과하다고 발표하여 <타임>지 8월호 표지를 장식했다.
부자들은 개인 클럽처럼 꾸며놓고 암호명을 가진 사람만 입장시키는 ‘무허가 술집’을 드나들었다. 이 술집들은 경관이 지켜보는 앞에서도 버젓이 영업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밀조 진을 마셨고, 약사들은 의약용 알코올을 조제하기에 바빴다. 금주법의 예외 적용을 받은 종교적 성찬용 포도주 제조량도 폭증했다. 금주법으로 알코올중독율과 관련 사망률이 줄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는 ‘밀조 진’에 소독용 알코올을 사용하는 데서 오는 치사율을 간과한 것이었다.3)
1920년대 조선 기독교계의 금주운동에서도 미국에서 금주법 덕분에 폐결핵 사망자 수가 크게 줄었다는 내용까지 제시했지만,4) 밀주가 성행하면서 오히려 미국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