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만물 속에 우주 끝까지 자신의 신호를 발산하는 에너지를 '장착해'놨어.
사람, 동물, 식물, 바위, 나무, 즉 모든 물체들이 무선송신기처럼 에너지를 내보낸다!
너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네 중심부로부터 사방팔방으로 에너지를 내보내고-발산하고-있어.
너 자신인 이 에너지는 물결 모양을 이루며 밖으로 퍼져나간다.
그 에너지는 너를 떠나 벽을 뚫고 산을 넘고 달을 지나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절대, 어떤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아.
네가 지금껏 가졌던 모든 생각들이 이 에너지를 색색이 물들이지.
(네가 누군가를 생각할 때, 만일 그 사람이 충분히 예민하다면, 그는 그걸 느낄 수 있어.)
네가 지금껏 뱉어낸 모든 말들이 그 에너지를 형성해. 네가 지금껏 행한 모든 행동들이 그 에너지에 영향을 미쳐.
네가 발산하는 에너지의 진동과 속도, 파장의 길이와 진동수는 네 생각, 기분, 느낌과 말과 행동에 따라
항상 바뀌고 변한다.
"좋은 진동 내보내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거야. 그건 맞는 말이야. 아주 정확해!
그리고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같은 일을 하고 있지. 그래서 너희들 사이의 "허공"인 에테르는
에너지로 채워져 있어.
허공은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복잡한 융단무늬를 형성하는 얽히고 얽힌
개개 "진동들"의 바탕 망(Matrix)이야.
이 직물이 너희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결합된 에너지 장이야.
그것은 강력해서, 너희를 비롯해서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가 영향받는 유입 진동들의 임팩트를 받아서 새로 창조된 "진동들"을 발산하지.
그리고 이 진동들은 다시 그 바탕 망 속에 보태져 바탕 망을 변화시키지. 그러면 바탕 망은 다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에너지 장에 영향을 미쳐 그들이 내보내는 진동에 영향을 주고,
그게 그 바탕 망에 영향을 주고, 그게 다시 너희에게 영향을 주고... 그렇게 계속.

너희는 이것이 순전히 그냥 팬시한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공기가 너무 두꺼워서 칼로 자를 수도 있는" 방에 들어가 본 적 있나?
아니면 같은 시기에 같은 문제를 연구하는 두 과학자 이야기는?
지구의 정반대쪽에서 상대방을 전혀 모르고 연구했는데, 갑자기 똑같은 해결책을
동시에, 독립적으로 얻게 되는 두 과학자 이야기 말이야.
이런 일들은 흔해. '바탕 망'이 좀 더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들 중 하나지.
그때그때에 따라 범위를 달리하는 '현재의 총 에너지 장'인 '바탕 망'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진동이야.
그건 물체와 사건에 직접 충격을 주고,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을 창조할 수 있어.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마태복음 18장 20절])
너희의 인기있는 심리학은 이 에너지 바탕을 "집단의식"이라고 부르지.
그건 너희 행성 위의 모든 것, 전쟁의 전망과 평화의 가능성, 지구 차원의 재난이나 행성의 평온, 질병의 확산이나 세계 복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실제로 미치고 있고. 그 모든 것이 의식(consciousness)의 결과야.
너희 개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더 구체적인 사건들과 상태들 역시 마찬가지고.
요즘엔 티비 씨에프에서도 '진리'를 담고 있는 명제가 광고 카피로 무심코 전파를 탄다.
ㅡ "생각이 에너지다."
모르겠다, 위 카피는 혹
'머릴 잘 쓰면 석유 없이도 문명을 영위하고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얄팍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을 뿐인 건지도.
하지만, 생각은 에너지 맞다.
생각이 에너지라 함은, 너무도 미묘하고 시시각각 여여한대로 천변만화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기술적으로 측정되기 힘들지만, ‘생각’이, 생각이 일으키는 파동이
일정한 에너지 준위와 물리력(힘)을 갖고 물체 등의 현실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돌은 '죽어 있는' 거라는 우리의 일상적 인식은 그러나 바위인 채로 무수한 각 원자핵의 주위를 맹렬히 돌고 있는
더 무수한 전자들의 원운동에 대해서 무언가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떤 돌들이 '치유' 작용을 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거기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는 정도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이것도 파동간의 공명, 간섭, 상쇄작용의 결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에너지로부터 물질에 이르는 길은 우리 인식 속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건 아마도 진동수의 크기의 문제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거 아닌가 싶다.
존재하는가?
자유의지 ..

'물체와 사건' 모두를 위에서처럼 파악하는 것은
만사가 '오온의 가합'이라고 본 불교적 인식론과 같은 것이다
3연딸을 치니 여자따위는 마구니로 보이는군아 ...
너희들의 엉킨 핏줄과 근골은
" 사대와 오온의 가합일 뿐 ."
어찌 내 범부들과 같이 욕심을 내리오?
채색한 항아리 속의 독사들이여
똥찌꺼기 가득 찬 가죽주머니에 불과한 그대들이여
어찌 세간을 벗어난 나를 잡으려 하느뇨
나는 공중을 자유로히 나는 바람과 같으니
그대들의 애욕으로는 영원히 날 묶어두지 못하리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론(無我論)은.... 실체적 자아는 없으며 오직 연기하는 자아만이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붓다가 활동하던 당시 인도 전통 철학에서는 아트만이라는 자아 개념을 상정하고
이 아트만이 생(生)에서 다음 생(生)으로 유전하는 윤회(輪回)의 주체가 된다고 믿었다.
인도 사상과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에 이르는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는 윤회를 영혼이 윤회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교는 윤회에 윤회에 대해 언급하는 고대 그리스의 영혼 개념과 인도 전통 사상에서의 아트만 개념을
모두 실체론적 자아로 파악하고, 실체론적 자아는 무명에서 비롯된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아가 무아(無我)이고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착각이라면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가 가능한지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윤회는 초기 불교가 언급하지 않은 외래 사상이며
또한 붓다가 방편설로 취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석
가모니의 교설 중 상당 부분에서 윤회를 전제로 한 업설(業說)과 12연기(緣起)를 해설할 때
윤회를 전제로 하여 설명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불교가 윤회를 방편설로 취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자아가 불교가 주장하는대로 무아라면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변화한다는 윤회설과
어떻게 양립하는지 여부가 불교내에서도 큰 논란이 되어 온 것이다.
본고(本考)에서는 불교의 무아론을 살펴보고 무아론과 윤회가 어떻게 양립가능한지 살펴보겠다.
무아론
내가 나임을 인지하는 자아는 常住하는 것이며 육체의 생명이 다할 때 이 자아라는 것은 영혼으로 불리워지며
이 영혼이 보다 좋은 곳(천국이나 천상)이나 나쁜 곳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와 세계 각국의 내세관(來世觀)이다.
내세 관념이 생을 영위하는 인간이 죽은 다음에 다른 존재로의 이행이라면
인간으로의 환생과 다른 존재로의 환생을 인정하는 인도 사상 역시 같은 부류에 속한 것이다.
즉 윤회론을 넓게 해석하면 죽음 이후에 존재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존재하느냐의 내세 관념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인간으로의 환생 역시 이러한 내세관념의 연장인 것이다.
이들 내세관념에서는 인간의 다른 존재로의 이행에 자아가 윤회한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인도 고전[바가바드 기타]의 어떤 판본에서는 어린아이-장년-노년-백골-어린아이 등으로 끝없이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파노라마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각 단계를 연속적으로 관통하는 아트만이 그려져 있다.
아트만 즉 자아는 동일성을 가지고 윤회한다는 것이다. 윤회 관념은 이렇게 해석되어져 왔으나
불교는 윤회의 주체인 자아는 실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불교적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자아라고 인식하는 것은 다양한 조건들이 상호 연관성을 가지면서
자아라고 불리우는 현상은 있으나 자아라고 불리우는 실체는 없다고 한다.
이 조건들은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이며 행위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역시 원자론과 흡사한 고정된 구성요소가 아니며 가변적인 현상을 개념화한 것이다.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五蘊)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이다.
온이란 곧 집합 ·구성 요소를 의미한다. 오온이 인간의 구성요소를 의미하는 경우에는
‘색’은 물질요소로서의 육체를 가리키며, ‘수’는 감정·감각과 같은 고통·쾌락의 감수(感受)작용,
‘상’은 심상(心像)을 취하는 취상작용으로서 표상 ·개념 등의 작용을 의미한다.
‘행’은 수·상·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특히
의지작용·잠재적 형성력을 의미한다. ‘식’은 인식판단의 작용, 또는 인식주관으로서의 주체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이들 오온은 연기적으로 결합하여 자아라고 인지되는 현상을 창출한다.
이 자아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결합된 즉 가합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조건들을 다시 찾게 된다고 한다.
오온으로 가합된 존재는 다시 오온을 찾아 ‘나의 것 만들기’와 ‘나 만들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석가모니는 태어남의 조건을 언급하면서 석가는 이러한 생겨남의 조건에 있으면서
또한 똑같이 생겨남의 조건을 구한다고 말한 것이다.
존재로 규정된 존재는 다시 그 존재 근거를 찾아 존재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오온이라는 조건은 행위에 의하여 취사선택되어 자아를 이룬다.
이러한 행위에 의하여 취사선택된 오온으로부터 자아의 내용은 실체적으로 고정적으로 규정될 수 없으나
행위가 누적되어 하나의 경향성을 띄게 될 때 자아의 존재형식으로서의 자아는 존재한다는 말이 성립되게 된다.
이를 업이라고 말하며 오온의 행(行)과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다. 둘다 행위하다라는 어원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오온의 행은 업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성향의 의미를 강조한다고 보면 된다.
업은 그 내용에 따라 윤회를 유도하는 악업(惡業)과
윤회를 차단하고 12연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선업(善業)으로 나뉘어진다.
선업은 악업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쓰이긴 하지만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선업이 이루어지는 배경인 " 탐진치(탐욕 , 성냄 , 어리석음)의 지멸(止滅)"에 도달하기 위하여
선업을 행한다는 것이다.
자아가 조건이 연기적으로 결합된 무아(無我)이고
행위의 흐름이 자아를 규정한다면 이러한 행위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경향성으로서의 자아 관념을 도출하게 된다.
이 상태의 자아는 (고정적이고 실체적인 영구불변의 자아가 아닌) 경향성으로서의 자아가 된다.
경향성으로서의 자아는 자아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건들 역시 고정되어 결합된 것이 아니며 찰나적으로 명멸(明滅)하며 가합으로서 자아를 구성하는 것이기에
시간적으로 앞의 자아는 뒤의 자아와 같지 않게 된다.
그러나 앞 존재의 성향이 뒤의 존재의 성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유사성을 가지고 연속된다.
자아의 구성요소들이 생멸하기 마련인데 어떻게 시간적으로 앞의 자아와 뒤의 자아가 연속성을 가지게 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의문은 앞에서 확인한 존재는 다시 그 존재 근거를 찾고, 생겨남은 다시 생겨남의 조건을 찾는다는
석가모니의 교설에서 해소될 수 있다.
생겨남은 생겨남의 조건을 찾는다는 교설은 하나의 경향성으로 해석될 수 있을 터인데,
자아의 구성요소 역시 동류의 구성요소를 찾기에 비록 생멸하는 구성 요소들이지만
경향성에 의하여 유사한 것들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윤회는 무아론과 양립가능한가?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했다.
“중생은 행위의 소유자이며, 행위의 상속자이며, 행위로부터 태어난 자이며(행위의 모태이며),
행위를 친척으로 하며, 행위를 의지처로 한다. 중생을 열등하게도 하고 탁월하게도 하는 구별을
생기게 하는 것은 업이다.”
석가모니의 이 교설은 행위가 누적되어 경향성을 이루고 이 경향성이 실체적인 자아가 아닌
자아의 형식으로서 자아를 규정한다면 자아의 윤회는 업의 윤회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서도 업이 이전하는 것으로 보면 석가모니의 교설과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
실체로서의 업의 유전은 불교가 경계하는 실체론적 아트만 윤회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음을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업은 경향성으로 인지되어 한다.
윤회는 행위의 습관과 그 결과로서의 성향인 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업의 선악에 따라 자신의 존재상태를 규정받고 규정해가는 존재인 것이다.
선한 행위는 자아를 선한 존재 상태로 규정하며, 악한 행위는 자아를 나쁜 존재 상태로 규정한다.
이러한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명제는 윤회에서 적용될 때 자아가 죽음을 맞이할 때
다음 존재가 겪을 결과로서 적용되는 것이다.
석가는 개, 소를 흉내내어 고행하는 수행자인 푼냐와 세니야에게
개의 행위는 죽음 이후에 개로, 소의 행위는 소로 죽음 이후에 소로 귀결된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어떤 범주의 중생이 되느냐의 여부는 존재가 어떻게 행위해 왔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석가의 이 교설은
경향성으로서의 업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다.
즉 자아는 무아(無我)이며 자아라는 불리는 현상은 존재하지만
고정적 실체로서의 자아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고정적으로 보이는 자아는 오온의 가합이며 업의 자아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14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는데,
이 질문들 중에는 아트만의 실존 여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석가모니가 아트만의 실존 여부에 대해 답변을 하지 않은 것은
아트만이 있다고 하면 실체론에 빠지게 되고
아트만이 없다고 하면 업으로서의 자아, 행위로서의 자아, 가합된 자아를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윤회는 12연기에 따르면 존재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12연기의 과정을 밟아가며 발생한다.
무명으로부터 시작된 윤회는 존재가 12연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때, 오온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 무명 이전으로 회귀하지 못하는 이상 끝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의 자아 개념과 윤회론과 수행론은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현상으로서의 자아는 윤회하지만
윤회는 자아가 고정적이다는 자기 인식으로 인한 것이라
수행으로 무아론을 증득하여 윤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불교에서의 자아에 대한 이론과 윤회의 상관성이다.
윤회는 자아가 독립되고 실체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며
불교의 무아론을 정확히 이해하게 되면
윤회는 무아윤회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한다는 것과 윤회하는 존재가 무아라는 이야기는 의미는 같지만,
윤회의 이해에 큰 차이를 낳게 된다.
무아론과 윤회설이 양립불가라는 논쟁은
무아론을 윤회하는 존재가 무아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초기 불교는 무아론과 윤회의 양립 가능성에 대해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윤회하는 존재가 무아라고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아인 존재가 윤회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여진다.

무아론에 초점을 맞추어 윤회를 이해했다면
불교내에서 수많은 논쟁을 일으켜왔던 윤회와 무아론의 양립 불가능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본다.
무아를 이해할 때 언급되는 12연기와 오온 그리고 업의 개념을 이해하면
윤회는 업의 실체적 흐름이 아닌 경향성으로서의 업의 윤회로 이해되게 된다.
불교에서 무아론과 윤회론과 수행론은 서로 엮이는 관계이며
무아이지만 무명 때문에 무아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윤회하고
무아임을 인식하기 위하여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에
삼자의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