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며느리 덕분에 가정에 찾아온 복
글/ 허난 대법제자 가족
[명혜망] 나와 아내는 80대 고령에 이르렀다. 이웃과 친척들은 우리 내외가 복이 있다고 칭찬한다. 우리도 만년에 매우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건 어디에서 날아온 복인가? 원인은 여러 가지인데 가장 주요한 것은 우리한테 법륜대법을 수련하는 큰 며느리 정련(净莲)이 있기 때문이다. 며느리는 정말로 깨끗한 연꽃같이 성결하다. 며느리의 효도는 밤새 말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간단히 몇 가지 예를 들겠다.
정련은 올해 50여 세이다. 하지만 파룬궁 수련으로 신체가 특별히 건강하고 매우 젊어 보인다. 모두 40세가 안 돼 보인다고 말한다. 며느리는 과장급 간부인데 아직 퇴직하지 않았다.
우리 집으로 갓 시집왔을 때 친척과 동료는 모두 예쁘고 똑똑한 며느리를 들였다고 칭찬했다. 정련은 품성이 좋고 선량하고 부드러우며 기품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공경하고 매우 효성스러웠다. 그러나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온몸에 병이 들어 동서남북 곳곳으로 명의를 찾아다니느라 자신도 돌볼 수 없었고 우리도 돌볼 수 없었다. 우리 온 가족은 그녀의 아픔에 가슴 아팠고 조급하고 근심에 쌓였다.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기 위해 1995년 말 정련은 법륜대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대법의 요구에 따라 열심히 수련했으며 일마다 ‘진선인(真、善、忍)’의 표준에 따라 처리했다. 연공 한지 1개월도 채 안 돼 병이 다 나았고 날아가듯이 걸어 다녔다.
사람도 낙천적이고 명랑해졌으며 온종일 싱글벙글했다. 이때부터 며느리는 우리를 친딸보다 더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많은 일에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특히 현재 세상 기풍이 날로 떨어지는 사회에서 어떤 사람은 인륜마저 어기고 있는데 우리 며느리와 같은 사람은 등을 켜고 다니며 찾아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변비는 노인들의 통병(通病)이다. 아내는 최근 십 년간 줄곧 변비였다. 변비있는 사람한테는 바나나가 좋다고 해 정련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바나나를 사왔다. 아내는 큰 며느리만 보면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장 감동된 일은 아내가 연속 8일간 대변을 보지 못했을 때였다. 며칠간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었고 배가 부풀어 매우 괴로워했다.
8일째 되는 날 오전 정련은 시어머니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상점에 달려가 투명한 비닐장갑을 사다가 손에 끼고 아내에게 말했다. “어머니, 약을 먹어도 안 되니 제가 그것을 후벼낼게요. 그러면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는 처음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찌 며느리한테 이런 일을 시킬 수 있겠는가.
아내의 심중을 헤아린 정련이 말했다. “나는 연공인 입니다. 일반인이 아닙니다. 우리 연공인은 고생을 낙으로 여깁니다. 곳곳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다. 어머님의 고통을 덜어 들일 수 있다면 제가 좀 더럽고 고생스러워도 괜찮습니다. 저의 마음도 기쁩니다.”
아내는 정련의 거듭되는 권고로 동의했다. 이렇게 정련은 더러움을 무릅쓰고 십여 분 동안 땅땅 마른 대변을 후벼냈다. 이 일로 아내는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죽을 때까지 큰 며느리의 좋은 점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련은 우리를 보게 되면 우선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른다. 부르지 않으면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일 년 사계절 계절이 바뀔 때마다 늘 새 옷을 사왔으며 몸에 맞지 않으면 다시 가서 바꿔왔고 우리가 만족할 때까지 보살폈다.
우리와 둘째 아들 여러 딸은 집에 일이 있으면 큰 아들을 찾아 의논하는 게 아니라 정련을 찾아 의논한다. 왜냐하면 며느리가 배치하는 일이 매우 합당하기 때문이다. 큰아들은 중요한 곳에서 직무를 보고 있어 성격이 급하고 말이 거칠다.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들 딸들이 번갈아 간호했다.
정련은 첫날에 나를 간호하게 됐다. 정련은 딸보다도 더 세밀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알아서 했다. 반찬도 나의 입에 맞았다. 다른 사람이 간호할 때면 저녁 시간을 내 병원에 와서 마음이 즐거운 말을 해줬다. 정말로 정신이 7할이고 병이 3할이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2달 동안 입원해야 낫는 병이 나는 한 달 만에 나아 퇴원했다.
정련은 우리 부부를 가장 많이 돌본다. 아내는 나이가 들어 손발이 자유롭지 못해 혼자서 목욕탕에 갈 수 없다. 아들 딸들도 다 걱정은 하지만 서로 바쁘다고 아내와 함께 목욕탕에 가지 않았다. 매번 목욕탕에 함께 가는 일은 정련의 몫이었다.
나중에 며느리는 새집에 이사 갔고 온수기를 설치해 일 년 사계절 사용할 수 있어 매번 목욕할 때면 정련은 시어머니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목욕시켰고 늘 따뜻한 차를 끓여 목욕이 끝나면 마시게 했다. 며느리는 언제나 차분하고 세심하게 아내의 등을 밀어 드렸다. 목욕하고 돌아와서는 큰 며느리가 등을 밀어주는 게 정말 편안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좋은 며느리를 정말 더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대법이 가르친 사람은 다르다!’라고 말했다.
정련은 자신의 가정에서 현모양처이다. 큰아들은 성격이 좋지 않았으나 정련은 늘 그와 견식을 같이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욕을 먹고 억울함을 당해도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변론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웃으면서 자신이 잘못했으며 다음번에 잘할 것이라 말했다.
아들이 중요한 관직에 있어 적잖은 뇌물을 받게 되는데 고급 담배와 술, 명차 등이 있었다. 어떤 때는 현금을 받을 때도 있다. 정련은 늘 자신의 남편에게 도리를 알려주었다. 사람은 절대 의롭지 않은 재물을 받지 말아야 하고 돈에 눈이 멀지 말아야 한다. 부패하고 바르지 못한 바람에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뇌물을 받으면 수명이 짧아진다고 말했다. 또 머리 석 자 위엔 신령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좋은 것을 가로채면 하늘이 다 보고 있는 것으로 한때의 좋은 점을 탐하지 말며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 그래야 온 가족이 좋으며 자손들도 복을 받는다고 했다.
이렇게 여러 차례 말해 아들은 마침내 정말로 명백해져 한번 또 한 번 받은 뇌물을 알맞게 잘 처리했다. 아들의 직장에서는 모두 그를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말했다. 물론 큰아들한테 대법을 수련하는 현처가 내조하고 있음을 다 알고 있다.
정련의 이야기는 너무 많아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내외나 친척들이 그녀를 칭찬하면 그녀는 늘 자신이 부족하며 대법의 요구와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우리는 큰 며느리를 통해 대법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이곳에서 나는 마음속 깊은 말을 하겠다. 대법을 수련하는 큰 며느리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더욱 그녀의 사부님 李洪志 대사님께 깊은 경의와 감사를 드린다!
문장발표: 2012년 8월 26일
시댁과의 18년 원한을 풀어준 대법
글/ 헤이룽장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1996년에 운좋게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수련 후 가정에서의 가장 큰 수확은 시댁과의 18년 원한을 풀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얻게 된 것이다.
나와 남편은 1971년에 결혼했는데 결혼 후 회사의 공동재산인 원룸에서 살았고 딸 둘을 낳았다. 1974년 남편은 불행하게 악성 뇌종양에 걸려 3년을 거의 병원에서 보냈다. 그때 바삐 돌아다니느라 기진맥진했고 집의 빚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당시 남편의 임금은 29위안, 내 임금은 37위안 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시댁의 도움을 받길 원했는데 가령 나를 도와 하루라도 남편을 간호해준다거나 혹은 정신적으로 좀 위로해주며 가정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줬으면 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내가 얻은 것은 비난과 욕설뿐이었다.
1976년에 남편이 위독해졌다. 당시 두 시동생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집은 원룸만 덜렁 있었을 뿐이었다. 시댁은 환자를 돌봐주겠다는 구실을 대며 집을 차지하려 했고 또 이혼을 설득하기도 했으며 큰딸을 키워주겠으니 그들에게 달라고도 했다. 나는 모두 거절했다.
시댁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트집을 잡으며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두 시동생은 음식을 가렸고 시어머니는 아이들을 때리고 어른을 욕하며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어떤 때 이상한 사람을 데려와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방법이 없어 직장, 파출소, 사무실, 주민위원회, 사법을 찾아가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는데 이들은 내가 매를 맞을까 봐 아이를 데리고 먼저 잠시 떠나있으라고 했다. 파출소 지도원은 내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며 “선생이라면서 이 집안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몰라요? 누가 당신의 안전을 보호해줄 수 있어요? 언젠가 시체를 처리해야 할지도 몰라요”라고 했다.
이후 시댁은 큰 딸을 학교에서 납치해 외지로 보냈다. 나는 가슴이 저미는 듯 아팠고 그들을 극도로 증오했다! 집을 떠난 지 10여일 됐는데 남편 직장에서는 그가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주며 시댁에서 내가 집을 차지할까 봐 집을 회수하기로 결정했고 장례비와 임금은 모두 시댁에서 받아갔다고 했다.
소식을 들은 나는 매우 슬펐다. 집에 도착했을 때 시신은 이미 화장됐고 집에는 단 두 개밖에 없던 이불을 영안실에 가져가 바닥을 닦았고 오줌을 싼 낡은 온돌용 이불밖에 남지 않았다. 분개와 슬픔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고 울다 쓰러졌다. 5살 막내딸만 울면서 엄마를 불렀다! 직장 사람들도 우리 모녀를 위해 눈물을 흘렸고 몹시 분개하였다!
시댁은 내 살길을 끊어버렸고 양식증(그때 양식을 사려면 양식증에 있어야 했다)마저 가져갔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은 직장까지 찾아와 ‘내가 남편을 학대했다. 벌써 바람을 피웠다. 둘째 딸도 남의 자식이다. 기어이 나를 때려 불구자로 만들어 형을 위해 복수하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내막을 모르는 일부 사람들도 따라서 이러쿵저러쿵 마구 수군거렸다.
이 모든 것에 맞닥뜨려 나는 증오로 가득 차 복수할 마음이 저절로 생겼다. 그들에게 구천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게 됐고 홧김에 시댁을 고소했다. 소송은 2년 넘게 걸렸고 법원에서는 보기 드문 가정이라고 했다. 결국 승소하긴 했지만 병든 막내딸만을 데려올 수 있었다.
이후부터 시댁과 왕래를 단절했다. 매번 시어머니가 마구 욕하고 시동생이 내 친정집에 소란을 피우고 남편 앞에서 나를 때리고 등을 생각하면 쌓이고 쌓인 원한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결혼해서부터 큰 딸이 돌아올 때까지 9년 넘는 시간, 이 기나긴 시간에 나는 평생의 기력을 다 소모했다. 30여세 사람이 머리카락이 다 희어지고 노안이 됐으며 불면증, 현기증, 심계항진증(두근거림), 허혈성심장질환, 저혈당, 저혈압, 자궁근종, 요추디스크, 자율신경부조 등 10여 가지 질병에 시달린 나는 성격이 난폭하게 됐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딸을 위해 어떻게라도 살아야 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두 아이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키워 잘 사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맹세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양의사와 한의사에게 가봤고 몇 가지 기공도 배웠으며 또 불교도 믿게 됐는데 병은 나아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체(附體: 몸에 붙는 좋지 않는 영체)까지 초래됐다.
기쁘게 대법을 얻어 원한을 선해(善解)
극히 낙담하고 있을 때 1996년 한 친구가 내게 ‘전법륜’을 선물하면서 이것은 수련하는 책인데 심성을 닦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체를 건강하게 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사부님의 사진을 봤을 때 마치 길 잃은 아이가 단번에 가족 품으로 돌아온 느낌이었고 억울함인지 감동인지 모르지만 나는 참지 못해 대성통곡했다.
대법은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줬고 원한, 억울함을 쫓아냈고 내 몸과 마음도 크게 변했으며 우울하던 데서 기뻐함으로 변했고 초췌하던 안색은 뽀얗기도 하면서 붉은 빛이 돌았으며 몸무게도 20kg이나 늘었고 모든 질병이 나도 모르게 없어졌다. 진정으로 병이 없는 온몸이 가벼운 느낌을 체득했다. 그런 즐거움은 오직 수련인만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대법을 통해 사람 됨됨이의 도리를 알게 됐고 시댁과의 깊은 원한은 업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부님께서 “당신이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면 수련 성취할 수 없고 성불(成佛)할 수 없다.”[1]고 말씀하셨다. 사부님의 말씀은 18년 동안의 시댁에 대한 원한을 풀어줬다.
그리하여 아이와 함께 시댁에 갔다. 이후부터 18년 동안 중단했던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이들 보고 가보라고 했다. 큰 시누이가 퇴직하고 외지에서 돌아온 후 병에 걸렸는데 돌볼 사람이 없었다. 딸들은 그녀를 요양원에 보내고 입원비를 감당했다. 어떤 때 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아이들보고 그녀에게 갖다주라고 했고 옷이 부족할 때도 비교적 좋은 옷을 보내줬다.
막 50살을 넘긴 시동생은 암에 걸렸는데 내 딸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간호했다. 딸들의 행동도 그들을 감동시켰다. 시동생은 이전에 자신이 한 일을 부끄러워했으며 우리 집에 나를 보러오기도 했다. 시동생의 당뇨병은 매우 심했고 집안의 경제사정이 어려워 집에는 테이블 하나도 없었다.
나는 새로 산 테이블을 그들에게 보내줬고 입을 옷도 가져다줬으며 명절 때마다 아이들에게 인사하러 가라고 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왕래를 끊지 않았다. 재작년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시동생의 아이도 와서 이것저것 도와줬다. 그들의 행동도 완고한 친정어머니와 언니를 감동시켰고 동시에 사돈집에 대한 원한이 해소되게 했다.
평소 왕래할 때 그들에게 진상자료를 가져다주는 것을 잊지 않았고 수련한 후 신체의 변화와 대법의 신기함 및 공산당에서 탈퇴하도록 해줬고, 그들에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眞善忍好)!’를 염하라고 알려줬다.
사부님께서 “자비는 천지에 봄이 오게 한다”[2]라고 하셨다. 우리의 개변은 그들을 감동시켰다. 66세 생일 때 그들은 모두 왔는데 온 가족 20여명 식구가 모였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들은 나를 위해 5kg되는 보기 드문 큰 케이크를 주문해줬다. 온 가족이 함께 모이고 화기애애했다.
마음속에 맺혔던 18년 매듭을 드디어 풀었고 모든 원한은 다 구름처럼 사라졌다. 이 모든 것은 대법 덕분이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대법에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 ‘휴스턴 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2-법정건곤(法正乾坤)’
문장발표: 2015년 5월 17일
대법수련으로 건강 얻고 시어머니를 선하게 대하게 되다
글/헤이룽장 신수련생
[명혜망] 나는 금년 41세로 2013년 5월 6일 수련의 길로 들어섰다. 나는 이전에는 성질이 아주 나쁜 사람이었는데, 성격이 유별나게 강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남에게 지려고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너무 강해 사소한 일에도 굽히지 않고 끝까지 파고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집에는 나와 성격이 똑 같은 시어머니가 있었다. 물론 시어머니는 살림은 물론 무슨 일이나 모두 잘 했지만 성질 또한 보통이 아니어서 멀리 소문이 날 정도로 아주 사나웠다. 내가 이런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나 역시 당연히 만만하게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리 둘을 “바둑판에서 만난 호적수”라고 했다. 이렇게 고부간에 서로 지려고 하지 않았으니 둘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남의 집에 시집 온 며느리며 또 손아랫사람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내가 양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20여 년간을 살면서 많은 일에서 모두 화가 나도 내가 참아야 했다.그러므로 남편도 중간에서 아주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어 정신적으로 받는 압박감이 무척 심했다. 그러므로 항상 심기가 불편해서 얼굴에 웃음기를 띨 때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부사이의 관계를 원만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나는 밖에서 일을 할 때는 누구나 나를 보고 “일을 참 잘한다”는 칭찬의 말을 듣지만, 집에서는 언제나 시어머니 눈에 나기 때문에, 나는 영원히 그녀보다 못해서 늘 시어머니에게 흠을 잡혔다. 그러므로 나는 시어머니와의 모순적인 관계를 피하려고 될 수 있는 한 밖에 나가서 일을 했다. 그러니 나의 심정은 언제나 좋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억제를 당하는 데서 오는 심한 스트레스가 심신을 피로하게 하고 마음을 무겁게 하는 큰 부담감으로 오게 된 것이다. 어떤 때는 하루 일을 끝내고 밤을 맞게 되어도 불면증으로 온 밤을 뜬 눈으로 새우기도 했다. 이런 시간이 길어지자 결국 몸이 감당하지 못하고 문제가 생겼다. 목구멍에 멍울이 생겨 수술을 받았지만 역시 늘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아 약을 먹었지만 시원치 않았으며 음성까지 변해 늘 쉰 목소리 같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은근히 겁도 났는데, ‘이러다가 악화되는 건 아닌지?’ 하는 정신적인 압박이 매우 커서 혈압도 높아지고 정신마저 종일 흐리멍덩해졌다. 안색까지 누렇게 좋지 않아 하루 내내 이런저런 잡생각만 하면서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으며 몸은 더욱 무력해져 정말로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식구들은 이런 나를 보고 ‘게으름을 피운다’ 식의 표정으로 싫은 내색을 했다. 나는 20여 년간을 이런 압박감에 눌려 살면서 숨조차 제대로 쉬기가 어려웠으므로 정신이 붕괴지경에 이르러 사실상 살아갈 용기조차 없었는데, 그 마음의 괴로움은 이루 다 형용할 길이 없었다.
나는 바로 이렇듯 고통스러웠지만 무슨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웃집에 가게 되었다.그 집은 외지에서 온 사람으로 세를 얻어 살고 있었는데 집 주인인 그녀로부터 사연을 듣게 되었다. 집의 유일한 아들이 악성 뇌류증(腦瘤-신경관 결손으로 두개골이 열린 사이로 뇌실질이 돌출되는 뇌의 기형증세) 환자로 수술을 받았지만 얼굴이 마비되고 눈과 입이 비뚤어진 채 말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혼자서는 거동조차 할 수가 없어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그런 환자였다.
수술을 한 하얼빈 의과대학 담당의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