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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주의보 일기예보 중에 ‘안개주의보’가 있다. 안개가 끼어 육안으로 물체를 분간할 수
있는 최대 거리가 1km 미만일 때 내려지는 경보다. 운전자들은 비상등을 켬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상대방에게 알려, 부주의로 인한 충돌을 막아야
한다. 비상등은 상대를 위한 배려이자 경고이며, 그 자체로 자기 보호 장치다. 보행자들은 손을 뻗쳐서 앞에 무엇이 있는지 어림짐작하며 걷는다.
안개 속을 걷는 일은 낭만적인 게 아니라 불안하고 위험하다.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 감독의 영화 〈안개 속의
풍경〉(1988)에서도 안개 낀 숲은 먼 기억 속에 희미하게 덮여가는 모호한 시간을 상징한다. 그 안에는 끔찍한 상처로 뒤덮인 과거가 있지만,
아이들의 대사처럼 ‘무섭다’고 말하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기에, 일단 밖으로 나와야 한다. ‘안 무서워’는 실제적 심리 판단이 아니라 일종의
상징적 자기 암시다. 어디로든 걷지 않으면 안개 속에 삼켜지기 때문이다. 주저앉은 자에게 인생의 문이 열리지는 않는 법. 만에 하나, 그 기적이
자기 거라는 착각은 유아적이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 세상에는 누군가의 눈과 귀를 덮는 안개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여 인생을
소모하는, 말릴 수 없는 열정의 주인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개 속을
걸어가기 안개주의보는 날씨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생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때로는 우리 인생 자체가 뿌연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불안하고 위험한, 불연속적 무한궤도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전도유망한 미래란 내가 딛는 한걸음에 달린 것이지, 내 앞에
미리 깔린 탄탄대로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루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그게 비록 금수저의 길을 가 본 적이 없는 이의 생애
감각일지라도, 안개 속을 걷는 법을 배우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인생여정에 조난당하지 않는, 자기 보호법에 대한 경험조례는 형사사건의
판례만큼이나 절실하다(나는 언젠가는 이런 것들을 모아보고 싶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지도, 멘토, 조언자, 리더와 같은 다양한 단어가 있다. 앞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비슷한 길을 앞선 간 이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용하다는 점성술사를 찾아 운을 묻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은 예전과 다르고, 참조점이 변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현대인들은 도대체 전대미문의 삶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기 앞의 생에 대한 감각과 판단을
발달시키려는 스스로의 모색이다. 역사에 반복은 없고, 세상은 점점 빠르게 변해가며, 지구상에 나는 오직 단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안개등 점검 인생에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이제 막다른 벽에 부딪혀, 주저앉아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스스로에게 안개주의보를 내리고 마음의 안전등을 켜보는 훈련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단,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심을 내어 안개 속을 빠져나올 수 있다. 인생의 방향을 모른다면, 일단 안개를 빠져나와 생각해 보자. “안 무서워. 시간이
지나면 흩어질 안개일 뿐.”이라고, 남의 말을 흉내 내듯 해 봐도 좋다. 인생에는 안개 장인(장인처럼 공들여
희뿌연 안개를 만들고 분사하는 이)도 있지만, 안개등의 발명가도 있고, 그것을 나눠주고 켜주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요지경이지만
또한 살아갈 만한 것이다.
세상이 좋아졌고, 더 좋아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여전히 각자의 생은 자기 몫으로 남아 있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안개 속을 걷는 법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더위가 한풀 꺾인 팔월이지만, 폭염 걷힐 날을
기다리기보다는 그것을 이미 한참 통과한 나 자신을 격려하며, 스스로의 어깨를 두드려주자. 어쩌면 오늘 우리가 무심코 켠 안개등이 누군가의 삶을
밝혀 한 생을 구하고, 무모한 안개 장인의 파괴적 열정을 해체시켰을 수도 있지 않나.
아직 여름이 뜨거울 때, 자신만의
안개등을 점검해 보자. 먼지를 닦고 불을 켜보자.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과 데이터 자원이 된 위험 신호들이 이제 인생의 훼방꾼이 아니라, 앞길의
이정표와 안전선이 되어 길을 밝혀 줄 거라고, 감히 제안해 보는 것이다. |